집에서 만든 전기, 이웃끼리 사고팔고..블록체인 믿고 거래한다 [커버스토리]

퍼스(호주) | 글·사진 임지선 기자 입력 2019. 1. 12. 06:01 수정 2019. 1. 1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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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호주 개인 간 전력 거래 시스템

지난달 3일(현지시간) 찾은 호주의 서부 항구도시인 프리맨틀시에 위치한 마틴 안다의 주택 지붕에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있다. 안다는 ‘파워레저’ 프로그램을 이용해 낮 동안 모아진 태양광 에너지를 블록체인에 기록하고, 미리 설정해둔 가격에 따라 이웃과 태양광 에너지를 사고판다.

한전이 독점한 한국과 달리 여러 업체가 있는 호주 소비자가 각기 다른 업체 연결돼 있어 개인 간 거래는 비효율적

지난해 12월3일 호주의 서부 항구도시인 프리맨틀시. 마틴 안다(58)는 밤 10시 퇴근 후 컴퓨터를 켰다. 그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오늘 모은 전기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낮 동안 지붕 위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을 통해 모은 태양광 에너지 전력과 거래 체결 시스템을 확인한다. 그는 전날 밤 1㎾당 최대 9.9센트면 사고, 최소 14센트에 팔도록 가격 설정을 해뒀다. 이날은 거래가 안됐지만 설정해둔 가격대에 사려는 소비자가 있다면 안다도 모르는 사이에 거래는 이뤄지고, 안다 집에 모아둔 태양광 에너지는 이웃에게 전달된다. 그 역시 태양광 에너지를 이웃 주민으로부터 언제든지 살 수 있다. “에너지 프로슈머 세상이 된 것”(동국대 박성준 블록체인센터장)이다.

안다가 블록체인 기반 개인 간(P2P) 전력 거래 시스템인 ‘파워레저(Power Ledger)’를 이용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11월이었다. 과거에는 일방적으로 거대 전력회사에서 에너지를 공급받기만 하다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면서 전기를 스스로 만들어 쓰는 ‘자급자족’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남는 전력을 이웃에게 직접 판매까지 할 수 있게 됐다. 개인끼리 전력을 사고팔 수 있도록 한 매개체는 ‘블록체인’이다.

안다는 “버려질 수도 있는 에너지인데 지금은 재사용할 수 있는 구조가 됐다”며 “지구환경 보호를 위해서도 좋은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 블록체인으로 개인끼리 전력 거래

데이터를 여러 블록에 나눠서 저장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에너지 산업에까지 파고들었다. 세계 최대 비영리 민간 에너지기구인 세계에너지협의회(WEC)는 2017년 11월 보고서에서 ‘에너지 업계는 금융업계를 제외하고 블록체인을 도입하는 데 가장 앞선 분야’라고 평가했다.

프리맨틀시에서는 개인 간 에너지 거래가 시범적이지만 실제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개인끼리 사고팔 수 있도록 블록체인 플랫폼을 제공하는 스타트업 회사 ‘파워레저’를 찾았다. 파워레저는 퍼스 시내 중심가 빌딩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양을 상징하는 ‘파워레저’ 로고가 적힌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젬마 그린 회장은 에너지와 블록체인을 결합하게 된 계기부터 설명했다.

그는 2012년 서호주의 커튼대 교수와 대화하다가 ‘전력시장의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발전소와 전기회사라는 중앙화된 시스템을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친환경적으로 새롭게 만들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이미 거대한 정부와 기업이 장악한 시장에서 개인의 전력 거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장치인 소프트웨어가 없었다.

2016년 1월 지인으로부터 블록체인 개발자들을 소개받았다. 이들은 블록체인으로 개인 간 거래를 실시간으로 기록할 수 있고, 그 기록을 모두가 믿을 수 있도록 공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린 회장은 “사실 처음 블록체인이나 비트코인 기술을 들었을 때는 말도 안되는 소리, 어리석은(stupid)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러다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블록체인과 에너지를 접목시킬 수 있다는 글을 봤고 4개월 뒤 바로 회사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개인 간 에너지 거래가 일어나는 구조는 쉽게 말해 온라인 장터와 비슷하다. 낮에 각 가정에서 태양광 패널을 통해 에너지를 모은다. 개인들은 파워레저 플랫폼에서 직접 판매 또는 구매 가격을 설정할 수 있다. 모은 에너지양과 가격 설정 모두 블록체인에 기록된다. 소비자이자 생산자인 개인이 각자 팔려는 가격과 사려는 가격을 설정해두면 30분마다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업데이트를 거쳐 거래가 이뤄지도록 한다. 가격이 맞아 거래가 체결되면 생산된 태양광 에너지가 소비자인 이웃의 집으로 옮겨가는 것은 기존 전력회사의 전력망을 이용한다.

에너지 거래 플랫폼 제공 스타트업 기업 ‘파워레저’ 블록체인으로 난점 해결…전력 생산·거래가 ‘진짜’임을 보증

이 과정에서 기존 전력회사(서호주의 시너지 회사)와 파워레저는 각각 이용 수수료를 받는다. 이 점 때문에 전력회사도 개인 간 전력 거래를 환영한다. 물론 이 사업이 가능했던 데에는 호주 각 가정의 3분의 1 이상이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는 배경이 깔려 있다.

시범사업은 프리맨틀시 40개 가구를 대상으로 지난해 11월23일 시작했다. 파워레저와 서호주 커튼대, 머독대, 호주의 발전소 웨스턴파워, 전력회사 시너지, 정부 소유 수자원공사 격인 워터코프, 정부 건설사 랜드코프, 프리맨틀시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호주 정부가 250만호주달러(약 20억원)를 지원했다. 파워레저는 이와 별도로 2년 전 가상통화 공개(ICO)를 통해 전 세계 투자자로부터 2600만호주달러를 모았다.

개인 간 에너지 거래가 주는 장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보다 저렴하게 에너지를 살 수 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버려지는 에너지 없이 다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동 연구자인 커튼대 지속가능성정책연구소 칼라 레이놀즈 매니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떤 사람은 하루에도 몇번씩 가격을 바꾸고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사용자들의 반응을 보면, 아침에 커피 한잔 마시면서 가격을 조정할 수 있으니까 편하다고도 하고, 자기 지역의 깨끗한 에너지를 주변 이웃에게 팔 수도 있고 살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마틴 안다가 퇴근 후 자신의 집에서 노트북을 열고 블록체인 거래 플랫폼을 통해 이날 태양광 전력이 얼마나 모였는지, 얼마에 거래가 이뤄졌는지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 ‘믿을 수 없는 온라인 거래’에 신뢰 부여

여기서 블록체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현재 한국도 에너지를 개인이 생산하고 중개업체에 팔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수료와 시간이 들어간다. 블록체인은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기존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꾸고 대체하는 게 아니라 개선하는 것이다.

특히 호주의 전력 거래 산업은 한국의 한국전력처럼 독점한 게 아니라 여러 업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소비자가 각기 다른 전력 소매업체와 연결돼 있으니 개인 간 거래를 하기엔 비효율적이다. 복수의 업체가 각기 자료를 공개해야 하고 서로 원하는 가격이 맞아떨어져야 거래가 이뤄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은 실시간으로 데이터가 기록되고 여러 네트워크에 분산 저장되는 거래 장부이다. 하나의 저장소인 블록에 손을 대려면 다른 여러 블록까지 다 고쳐야 하기 때문에 블록체인은 위조·변조가 방지되는 기술이다. 즉, 온라인상 어딘가 있을 상대방과 나의 거래가 ‘진짜’라는 신뢰성을 담보해주는 기술이다.

에너지 거래에도 바로 이 점이 활용된다. 각 가정의 태양광 패널에서 전력이 생산되는 즉시 블록체인에 기록이 전송된다. 예전 같으면 소비자가 온라인상에서 전기를 개인으로부터 사려고 해도 상대방을 100% 믿을 수 없다. 상대방을 본 적도 없고, 실제로 전기를 생산했는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직거래’를 하지 않는 이상 언제든 사기 가능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이 에너지 생산과 거래가 ‘진짜’라고 보증을 해준다. 전력회사를 거치지 않고도 이 거래가 믿을 수 있는 거래라고 보장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이 각자 전기를 생산해내고 각자 ‘얼마 이하면 사고, 얼마 이상이면 팔라’는 설정에 따라 거래가 바로 이뤄질 수 있다.

효율성도 블록체인의 장점이다. 기존에 발전소를 거쳐 전력회사까지 오고 소비자가 전기를 사용하고 전기요금 청구서가 날아오기까지 60~90일 걸리던 과정이 단 몇초, 한순간으로 단축된다. 전력회사의 ‘개입’이 없기 때문에 중간 거래비용도 확 줄어든다. 블록체인이 에너지 거래의 ‘비효율성’을 효율적으로 바꿨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익명화돼 있어 개인의 컴퓨터 모니터상에서 거래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어느 집 누구인지까지 개인이 직접 알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기존의 발전소·전력회사·소비자로 통하는 연결 구조 전기 생산부터 소비·금액 청구까지 60~90일 걸려 블록체인은 전력회사 개입 없어 단 몇 초면 전 과정 완결

파워레저는 새로운 태양광 패널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종류의 배터리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블록체인을 이용해 누가 얼마만큼, 누구에게, 언제 팔고 거래했는지 기록을 추적하는 망을 제공하는 곳이다. 일종의 에너지 직거래 장터를 여는 회사인 셈이다.

그린 회장은 블록체인이 없었다면 개인 간 전력 거래는 이뤄지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전력시장은 발전소에서 생산되고 도매시장을 거쳐 소비자가 영수증을 받는 데까지 60~90일가량 걸려 굉장히 비효율적”이라며 “블록체인은 기록체계를 실시간으로 바꿀 수 있고, 따라서 거래 명세서를 바로바로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누군가 데이터를 조작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 간 거래도 가능해진다”고 덧붙였다.

그린 회장은 그러나 스스로 블록체인 맹신자는 아니라고 했다. 그는 “블록체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면서 “적용할 수 있는 특정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특정 분야가 바로 에너지이다. 블록체인 기술로 현존하는 전력 거래시장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현존하지 않는 개인 간 거래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워레저의 공동설립자 가운데 전력회사 출신도 있다. 데이비드 마틴 공동설립자는 서호주 전력회사인 웨스턴파워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그는 “처음 전력산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 담당 매니저가 ‘에너지 산업은 규모의 산업’이라고 했는데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블록체인으로 작고 분산된 에너지 산업, 지역단위의 저비용·저탄소·소규모 에너지 거래로 변환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워레저의 사업은 호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태국 정부, 일본 간사이전력 등과 손을 잡고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시범사업은 올해 6월쯤 논문으로 결과가 발표된다. 이를 위해 커튼대는 파워레저 시범사업 참여자를 대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시범사업이 지난해 11월 시작되기 6개월 전부터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했고, 전기 사용료 등을 비교하기 위해서 전력 사용도 추적했다.

칼라 레이놀즈는 “전기 생산뿐 아니라 전기 사용을 어떤 시간대에 얼마만큼 하는지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해 추적하고 있다”며 “앞으로는 각 가정에서 잉여전력이 많이 남는 시간대에 에너지를 구입해 그 시간에 세탁기와 식기세척기를 돌리는 등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설정해 나가는 방향까지도 계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

거래내역 장부를 여러 개로 분산 보관하는 ‘데이터 저장 기술’

블록체인은 장부에 거래내역을 투명하게 기록하고 여러 개에 나눠 똑같이 분산해 저장하는 분산형 데이터 저장 기술이다. ‘블록’ ‘체인’ ‘분산’ ‘신뢰’ 등 4가지 핵심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보상으로 주어지는 가상통화까지 관련 개념을 간략히 정리했다. 아래 내용은 전명산의 <블록체인 거번먼트>와 마이클 J 케이시·폴 바냐의 <트루스머신> 책을 참고했다.

■ 블록 : 거래내역 등 여러 가지 정보가 담긴 저장소이다. 특정한 시간 동안 거래된 내역과 관련 정보를 묶어 하나의 파일로 만든 것이 블록이다.

■ 체인 : 블록은 서로 연결돼 있다. 예를 들어 100번째 블록을 만들 때는 99번째 블록의 정보를 섞어 암호화한다. 101번째 블록 역시 100번째 블록의 정보가 담긴다. 즉 99번이나 100번이나 101번이나 블록들은 서로 다른 파일이지만 서로 연결돼 있다. 블록체인이란 서로 연결돼 있는 파일들의 묶음이다. 누군가 100번째 블록을 조작한다면 이는 앞뒤 블록의 정보와 다르기 때문에 조작된 파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블록체인 개발자들은 블록체인 전체를 위·변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 분산 : 흔히 블록체인은 똑같은 장부가 분산돼 있다고 한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한 비유가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똑같은 문서를 총 다섯 군데 분산해 보관했다. 5개 모두 진본이다. 블록체인도 마찬가지이다. 블록체인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컴퓨터에 똑같은 파일(블록)들이 보관된다. 어떤 한 컴퓨터에서 장부가 업데이트되면 동시에 다른 컴퓨터에서도 장부를 똑같이 업데이트한다.

■ 신뢰 : 블록체인의 구조 덕분에 참여자가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신뢰’이다. ‘진짜’ 장부가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져 있어 중개기관의 개입이나 조작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고, 중개자 개입 없이 개인끼리 거래가 가능해진다.

■ 가상통화 : 분산형 시스템에 참여해 암호화된 블록을 새로 만들어낸 사람을 채굴자라고 하며 이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게 비트코인 등 가상통화이다. 모든 대중에게 열려 있는 ‘퍼블릭’ 블록체인은 채굴이라는 시스템과 보상을 주기 위해 가상통화가 필요하지만 모든 블록체인에 가상통화가 필요한 건 아니다. 한정된 사람들만 사용하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에서는 가상통화가 필수적인 건 아니다.』

■ 특별취재팀 임지선(산업부), 주영재(주간경향부), 이재덕(뉴콘텐츠팀) 기자

퍼스(호주) | 글·사진 임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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