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과거사 모범국' 맞나? 그리스 "역사적 책임 져야"

김태훈 2019. 1. 1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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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그리스 간에 끊이지 않는 '나치 침략' 과거사 논란 / 그리스 정치인들 "독일, 파괴의 역사적 책임 한번도 안져" / '강제징용 피해 배상' 대법원 판결 후 한·일 갈등 보는 듯

‘독일은 전쟁과 유대인 학살 등 과거사 문제를 깨끗이 해결했다.’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과 반대로 독일은 과거청산 모범국이다.’

독일에 대해 많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선입관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최근 그리스가 독일을 상대로 “나치 침략으로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서 최근 일제 강제징용 사건 판결로 과거사 논란에 휩싸인 한국와 일본 관계를 연상케 하고 있다.

◆그리스 "독일이 과거사 반성 뜻으로 372조원 배상해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와 프로코피스 파블로풀로스 그리스 대통령.

13일 외신에 따르면 얼마 전 그리스를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그리스 대통령이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에서 저지른 나치의 과오에 대해 수십억 유로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프로코피스 파블로풀로스 그리스 대통령은 현지시간으로 11일 아테네 대통령궁에서 메르켈 총리와 만나 나치 점령 기간 그리스가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 문제를 거듭 언급했다.

파블로풀로스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에게 “그리스인들은 우리의 요구가 법적으로 효력이 있으며,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 문제는 유럽연합(EU) 차원에서 법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은 2차대전 도중인 1941∼1944년 그리스를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이 기간 동안 식량, 연료 등 그리스의 많은 자원을 독일에 빼앗긴 것은 물론 독일군에 저항하던 그리스 민간인 상당수가 학살을 당했다.

독일군의 물자 수탈로 전쟁 기간 그리스인 수만명이 굶주림과 추위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는 또 독일이 발행한 무이자 국채를 억지로 사들여야 했다. 그리스에 살던 유대인 약 7만명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1년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군이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앞에서 나치 깃발을 게양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리스 의회는 보고서를 통해 2차대전 나치 점령으로 인한 피해 규모가 2890억 유로(약 372조원)에 이른다고 추산한 바 있다.

◆독일 "1960년에 이미 3000억원 지불… 배상 문제 끝나"

그리스가 2차대전 발발 직후 독일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원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끌던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1940년 10월 그리스를 침략했으나 되레 격퇴를 당했다. 그러자 이탈리아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이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군대를 보내 순식간에 그리스 국토를 점령했다.

독일군은 1944년까지 그리스를 가혹하게 통치했다. 하지만 그해 영국·미국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동부전선에선 소련(현 러시아) 군대가 독일 영토로 밀고 들어오면서 자국 방어를 위해 그리스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동안 독일 정부는 “그리스에 대한 배상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돼 있던 1960년 서독 정부가 그리스 정부와 협의 끝에 1억1500만 마르크(현재 가치로 약 3000억원)를 지불, 배상 문제가 일단락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메르켈 총리는 파블로풀로스 대통령의 배상 요구에 즉답을 회피했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나치 점령 기간에 독일이 그리스에 초래한 고통이 얼마나 큰지도 잘 알고 있다”며 “우리가 이로부터 얻은 교훈은 그리스와의 우호관계를 확고히 하고, 양국의 상호 이익을 위해 협력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이라고만 말했다.

◆"독일은 과거사 모범국·일본은 불량국가" 선입관 '흔들'

결국 1960년 독일의 3000억원 지불로 두 나라 간 과거사 문제가 법적으로 다 해결된 것인지, 아닌지가 핵심 쟁점이다. “배상은 이미 끝났다”는 독일과 달리 그리스는 “배상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그리스 정치인들은 “독일은 한 번도 그리스를 완전히 파괴한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을 진 적이 없다”며 “나치의 독일 점령은 발전하는 그리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완전한 재앙”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리스 역사학자들도 “나치 독일이 2차대전 당시 아프리카를 침범하기 위해 그리스 정부에 강요했던 무이자 국채 발행이 상당수 국민을 가난에 빠뜨렸다”고 주장한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배상 등 과거사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일본, 그렇지 않다는 한국의 대립과 아주 흡사하다. 한·일협정은 한국이 일본에서 무이자 또는 저리의 차관 총 8억달러를 지원받는 것으로 식민지 피해 배상을 갈음했다.

최근 한국 대법원이 “한·일협정과 무관하게 일제 강제징용 등으로 피해를 본 한국인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한·일협정 체결로 모든 배상 문제는 끝났다”고 밝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방침까지 내비쳤다.

향후 한·일 관계를 풀어가야 할 정치권과 외교관들은 이번 그리스·독일 과거사 분쟁을 주시하고 참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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