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나치 독일 '제국음악원' 회원이었다

문학수 선임기자 2019. 1. 13. 18:4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57)가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를 파헤치는 <안익태 케이스 -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삼인)라는 책을 내놨다. 지난 10여년간 논란이 이어져온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비롯해 “ ‘안익태의 애국가’가 마치 국가처럼 불리게 된 과정”을 밝히고 있다. 한데 책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지점은 이미 상당히 드러난 친일보다는 ‘나치와의 관계’ 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이번 책에서 안익태가 독일의 ‘나치’와 어떤 협력·우호 관계를 맺었는가를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했다. 지난 11일 경향신문사에서 그를 만났다.

일단 이 교수는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던 안익태가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의 제국음악원 회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초대 총재를 맡았던 제국음악원은 나치 시절에 괴벨스가 주도해 만든 ‘음악가 조직’이었다. 1943년 7월 발부된 안익태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는 ‘안/에키타이, 1911년 12월5일생, 동경/일본 출생, 국적 일본’ 등의 사항이 기재돼 있다. 회원증 오른쪽 하단에는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사항이 없음’이라는 문구가 스탬프로 찍혀 있다. 제국안전본부 4국, 흔히 ‘게슈타포’라고 부르는 정보기관이 신원 조회의 결과를 그렇게 밝혀놓고 관인을 찍었다.

이어서 이 교수는 “회원증이 발부되기 약 한 달 전,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75세 생일 파티가 열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 베를린 주재 만주국 참사관이었던 에하라는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관련해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인물이다. 안익태가 일본의 괴뢰 정부인 만주국의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작곡했던 <교향적 환상곡 ‘만주국’>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은 에하라의 위장 타이틀일 뿐”이라며 “그는 학자와 예술가를 포함해 약 300명의 정보원을 관리하던 일본 측 스파이, 베를린 지역의 첩보 총책”이라고 말했다. “에하라가 나치 시절의 음악 권력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줬습니다. 일개 참사관이었다면 가능했겠습니까? 이 자리에는 아주 극소수 인원만이 참석했는데 나치 선전성의 음악국장인 드레베스도 왔습니다. 안익태도 당연히 있었지요. 이 자리에서 제국음악원 입회가 사실상 결정됐다고 봐야죠.”

이 교수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안익태가 유럽에서 지휘봉을 들었던 연주회들을 도표로 정리해 책에 실었다. 그는 “거의 모든 연주회가 나치 독일과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지역에서 이뤄졌다”면서 “활동의 정점을 찍는다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의 연주회도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던 1944년 열렸다”고 말했다. 책에는 당시 파리의 친나치 신문 ‘르 마탕’에 실린 안익태 관련 기사가 수록됐다. 이 교수는 그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안익태는 그해 4월18일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21일에는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했죠. 그런데 같은 시기에 카라얀도 파리에서 지휘했습니다. 19일과 20일이었죠.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간대에 파리에서 지휘봉을 들었던 것인데, 이 음악회의 성격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히틀러의 생일 축하 연주회였습니다.”

책에는 “카라얀과 안익태가 히틀러의 생일을 경축했다”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논쟁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이어서 안익태와 나치의 관계를 밝히는 마지막 빗장은 ‘독·일 협회’(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다. 애초에는 독일·일본 양국의 학술·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한 민간단체였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한 후 나치의 외곽 단체로 완벽히 개편됐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나치 친위대 인물들이 전면에 배치됐고 나치 선전성 등으로부터 공적 자금을 받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독·일 협회는 ‘1942~43 연례보고서’에서 “1943년 8월18일 에키타이 안의 베를린필 연주회를 자신들이 주최한 것으로 보고”한다. 한 해 전의 보고서에서는 “(안익태가) 1941년 7월11일 독일 방송국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방송 타워에서, 그다음에는 1942년 2월6일 하노버에서 니더작센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같은 해 3월12일 빈 심포니커와의 연주회를 보고”하고 있다. 이 교수는 “유럽에서 펼쳐졌던 안익태의 활동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면서 “일본 스파이 에하라 고이치는 그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고, 독·일 협회는 그를 후원하거나 연주회를 주최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해방 이후 한국에서 안익태를 격상시킨 배경에는 “ ‘기독교’ ‘미국’ ‘서북’이라는 당시 남한의 주류 네트워크가 있었다”고 했다. 이 세 가지를 상징하는 인물은 당연히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이 교수는 책의 후반부에서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자리’를 요청했음을 밝혀놓고 있다. 1953년 10월27일 이승만이 안익태에게 영문으로 보낸 편지에는 “워싱턴 대사관 문화 참사관으로 임명해달라는 당신의 요청과 관련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정치학자인 이 교수에게 “안익태라는 음악가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는 과거사 청산에서 완벽하게 실패한 나라”라면서 “지난 10여년간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밝혀진 데 이어 나치와의 관련성도 한꺼풀씩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 ‘국가’는 한 나라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안익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안익태의 애국가’를 마치 국가처럼 불러왔습니다. 법으로 공인된 ‘국가’가 아님에도 그냥 관습적으로 불러왔던 겁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이 ‘불쾌한 감각’을 계속 느껴야 하겠습니까.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도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불쾌한 감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안익태의 행적이 70%쯤 드러났습니다. 앞으로 누군가 더 찾아낼 겁니다. 이제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