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라는 이름의 집단학살 그만"..화천 산천어의 청와대 청원

입력 2019. 1. 18. 05:06 수정 2019. 1. 1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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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만마리가 죽어야 끝나는 이벤트
인간에겐 산천어축제라지만
우리에겐 집단학살입니다

닷새 굶주려 배고픔 못 참은 친구들
낚싯바늘에 입 찢겨 죽고
운 좋게 살아남아도 극도의 공포

가족과 함께 맨손잡기·얼음낚시
생명 앗는 게 과연 교육적일까요?
동물을 위한 행동과 시셰퍼드 코리아, 동물해방물결, 생명다양성재단, 동물구조119 등 5개 동물·환경단체가 꾸린 ‘산천어 살리기 운동본부’가 산천어축제가 개막한 지난 5일 축제장을 찾아 동물 학대 중단을 요구했다. 사진은 축제장에서 잡혀 죽은 산천어의 모습. 동물구조119 제공

제 별명은 ‘계곡의 여왕’입니다. 몸길이 20~40㎝로 옆면에 비행기 창 모양 무늬인 ‘파마크’가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송어·연어와 같은 ‘혈통’으로 사촌 간이죠. 저는 ‘산천어’입니다. ‘화천산천어축제’를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인구 2만7천명에 불과한 산골 마을인 강원도 화천군을 세계적인 축제도시로 이름을 날리게 한 주인공이 바로 접니다. 해마다 겨울만 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최전방 산골에 저를 보기 위해 150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듭니다.

제가 독자 여러분께 나선 것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 사연을 올려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가 웬 국민청원?’이라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악산 케이블카 탓에 서식지를 잃은 산양 29마리가 지난해 소송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용기를 냈습니다.

혹시 제 입장에서 산천어축제를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축제 개막일인 지난 5일 6만여 친구와 함께 화천천에 방류됐습니다. 14만4천여명의 관광객이 찾았다는 축제 첫날, 우리는 생지옥을 경험했습니다. 굶주린 친구들은 수많은 강태공이 드리운 낚싯바늘을 입에 물고 줄지어 얼음구멍 위로 사라졌습니다. 얼음벌판 위엔 그렇게 죽은 친구들이 즐비했습니다. 낚싯바늘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입이 찢겨 죽거나, 훌치기 바늘에 온몸 이곳저곳이 찔려 피를 흘리고 죽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길이 2.1㎞의 얼음벌판에 펼쳐진 수많은 얼음구멍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던 셈입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운 좋게 살아남아도 끝난 게 아닙니다. 축제가 막을 내리면 화천천에 펼쳐놓은 그물을 걷어 살아남은 산천어를 깡그리 잡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잡히면 어묵 등의 재료로 쓰이겠죠. 이래저래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시한부 인생인 셈입니다.

양식장에서 태어났으니 횟감이나 구이로 끝날 운명에 불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통스럽지 않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을까요?

산천어축제의 모든 과정은 우리에게 ‘학대’입니다. 우리는 전국 17개 양식장에서 흩어져 자라다가 축제를 앞두고 화천으로 수송되는데, 좁은 활어차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몇몇은 이 과정에서 서로 부딪쳐 상처를 입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배고픔입니다. 우리는 축제를 앞두고 5일 정도를 굶습니다. 이른바 ‘입질’을 좋게 하고, 사람들이 구이 등으로 먹을 때를 대비해 내장을 깨끗이 비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축제를 앞뒤로 한해 약 76만마리(181t)의 산천어가 사라집니다. 생존이 아닌 오로지 인간의 유흥을 위해 단 3주 안에 모두 죽고 끝나는 사건을 인간들은 ‘축제’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겐 ‘집단학살’입니다.

동물을 위한 행동과 시셰퍼드 코리아, 동물해방물결, 생명다양성재단, 동물구조119 등 5개 동물·환경단체가 꾸린 ‘산천어 살리기 운동본부’가 산천어축제가 개막한 지난 5일 축제장을 찾아 동물 학대 중단을 요구했다. 사진은 맨손잡기 행사장에서 참가자들이 산천어를 잡은 뒤 입에 넣고 환호하는 모습. 동물구조119 제공

'> “그럼 물고기를 잡거나 먹지 말란 말인가?”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필요한 만큼 낚시를 하거나 양식장에서 키운 물고기를 먹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놀이와 오락으로 어류를 학대하고 즐기는 것을 하지 말아 달라고, 인간으로서 다른 생명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겁니다.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어류도 통증과 공포,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사실이 증명됐습니다. 스위스는 지난해 3월부터 살아 있는 바닷가재(랍스터)를 끓는 물에 넣어 요리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동물보호법 개정안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개정법에 따르면 바닷가재를 기절시킨 뒤 끓는 물에 넣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식용의 경우라도 법적으로 ‘인도적인 도살’의 기준을 마련하는 추세입니다.

물고기도 동물입니다. 1991년 제정된 동물보호법을 보면, 어류도 동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법 8조는 △유흥 등의 목적으로 동물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 △공개된 장소에서 죽이거나 같은 종류의 다른 동물이 보는 앞에서 죽이는 행위 등 동물 학대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끼는 반려견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동물보호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면 왜 산천어축제는 처벌받지 않을까요? 같은 법 시행령에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동물로 보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 때문입니다. 도축 합법화를 위한 예외 조항인 셈이죠. 이는 현행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지금 축제장에서 벌어지는 행위가 동물 학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만약 물고기가 아니라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한곳에 몰아넣고 먹이를 끼운 바늘로 낚시한 뒤 잡아먹는 토끼축제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지금처럼 무감각하게 반응할까요? 어른들이 아이 손을 잡고 축제장을 찾을까요? 우리도 토끼와 마찬가지로 아픔을 느끼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단 3주 만에 수십만마리의 생명을 빼앗는 산천어축제는 아이들에게도 그리 교육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 단위 참가자가 많은 산천어축제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요?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다루는 법을 무의식적으로 배우진 않을까요? 심지어 산천어 맨손잡기를 하면서 우리를 입에 물고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는 관광객도 있더라고요.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다른 이의 고통에 무감각한 어른으로 성장할까 걱정됩니다.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동물에게 잔인한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도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을 위한 행동과 시셰퍼드 코리아, 동물해방물결, 생명다양성재단, 동물구조119 등 5개 동물·환경단체가 꾸린 ‘산천어 살리기 운동본부’가 산천어축제가 개막한 지난 5일 축제장을 찾아 동물 학대 중단을 요구했다. 동물구조119 제공

다행히 동물권 단체인 동물을 위한 행동과 시셰퍼드 코리아, 동물해방물결, 생명다양성재단, 동물구조119 등 5개 동물·환경단체가 모여 지난해 12월 ‘산천어 살리기 운동본부’를 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5일 개막일에는 축제장에서 동물 학대 중단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도 지켜봤습니다. 이들도 산천어축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 프로그램을 전면 재검토해 생명윤리에 반하지 않는,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한 축제로 바꿔달라는 겁니다. 운동본부는 이런 내용을 정리해 이번주 안에 화천군에 공문을 보내 정식으로 요청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사실 동물학대는 산천어축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팀이 2013~2015년 조사한 결과를 보면, 동물을 주제로 한 축제만 전국에 86개나 됩니다. 문어·전어·붕장어·은어 등을 주제로 한 이들 축제 대부분은 맨손잡기가 핵심 이벤트입니다. 심지어 오징어 할복(배를 가르는)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결국 동물 축제 상당수가 동물을 낚시와 맨손, 채집 등의 방법으로 ‘포획’한 뒤 ‘먹는’ 것으로 끝나는 셈이죠.

산천어축제의 대박 소식에 평창과 파주, 가평, 청평, 양평, 양주, 강화도 등에서도 우후죽순 송어잡기 축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민간도 아닌 지방정부가 나서 세금으로 동물 학대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런 우리들의 사연을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맨손잡기 프로그램을 전면 재검토해 생태적인 축제로 바꿔주실 수는 없나요? 축제에 이용되는 동물의 복지를 위해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오는 27일이면 축제가 끝이 납니다. 오늘도, 수많은 산천어가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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