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면 버킷 리스트보다 먼저 작성해야 하는 '○○리스트'

김진영 2019. 1. 2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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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진영의 은퇴지갑만들기(2)

삼성생명, 삼성증권, 신한은행에서 은퇴사업모델을 만든 개척자다. 2010년 1차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수많은 노후준비 해법이 제시됐지만 은퇴자의 여건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곧 2차 베이비부머들이 은퇴 대열에 합류한다. 지금까지 중구난방식으로 터져 나온 대응책으론 이들 역시 시행착오를 겪을 게 뻔하다. 1세대 베이비부머가 겪었던 경험과 실패를 바탕으로 새로운 은퇴자산 관리 방법을 제시한다. <편집자>
1차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터널에 진입한 지 10년이 흐른 요즘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은퇴설계를 제대로 해본 은퇴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1차 베이비부머 700만명 중 은퇴설계를 경험한 고객은 10%도 안 되는 것 같고, 그나마도 수박 겉핥기식 간이 설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은퇴설계 서비스를 받을 곳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 10여년간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의 은퇴설계 서비스는 크게 확산했다.

1차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터널에 진입한 지 10년이 흘렀지만 은퇴설계를 해본 은퇴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사진 pixabay]

그런데도 은퇴설계 서비스를 제대로 받아본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은퇴준비를 하는 본인 스스로에서 찾을 수 있다. 은퇴준비가 왜 필요한지, 내 재정상태는 어떤지, 향후 챙겨야 할 사항은 무엇인지, 우리 부부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등에 대해 고민이나 걱정만 했지 정작 의사결정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1차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는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무엇이 은퇴자를 우물쭈물하게 한 것일까.


“우물쭈물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첫 번째는 은퇴설계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지 몰라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현장에서 고객에게 은퇴설계를 제안했을 때 나오는 반응은 대부분 “나는 재산도 없는데 뭘 해. 창피하게…”, “그냥 놔둬,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았는데 뭘…”, “나 그런 거 몰라 집사람이 다해, 나는 주는 대로 쓰는데” 등이다. 적어도 은퇴문제만큼은 베이비붐 세대가 위의 부모 세대와 사고방식에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런 식은 평균 수명이 70세 정도일 때라면 몰라도 수명이 90세에 이를 베이비붐 세대한테는 곤란하다. 집 지을 때 설계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집을 지어, 나중에는 물이 새도 어디가 잘못됐는지도 알 수 없어 불법건축물 딱지가 붙은 경우와 비슷하다. 아파도 내 병은 내가 안다고 고집부리며 약국에서 약 하나 사 먹는 걸로 때우다 보니 서랍은 약봉지로 가득하고 정작 뒤늦게 병원에 가보지만 내성이 생겨 치료 약도 잘 듣지 않는다.

이렇게 30년이 흐르면 말년에는 집이나 몸 모두 누더기가 된다. 은퇴생활을 30년 넘게 하려면 정기 건강검진과 함께 은퇴설계도 필요하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매년 3000여명이 퇴직하는 국내 최대 전자회사가 퇴직자에게 나눠주는 퇴직생활 안내 책자가 있다. 은행에서 통장 만드는 법에 관한 것이 그중 하나다. [사진 pixabay]

두 번째는 자신의 재산상태를 너무 모른다는 점이다. 남자 은퇴자의 경우 ‘삼불지(三不知)’가 있다. 자녀가 어떻게 대학 들어갔는지 모르고, 우리 집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며, 마지막으로 부인이 언제까지 같이 살지 모른다는 말이다.

매년 3000여명이 퇴직하는 국내 최대 전자회사가 퇴직자에게 나눠주는 퇴직생활 안내 책자가 있다. 은행에서 통장 만드는 법에 관한 것이 그중 하나다.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은행 가면 먼저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다가 전광판에 번호 나오면…’ ‘운전면허증은 이렇게…’ 등이 주요 내용이다. 직장생활 30년 넘게 한 사람에게 주는 안내 책자라고 하기가 무색해진다. 무엇보다 돈 관리는 부인이 해온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남편의 금융상식은 거의 초등학생 수준에서 멈춰 있다.

은퇴설계를 위한 상담에서도 재산상태를 묻는 말에서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오래전 아는 사람이 사라고 해서 투자한 펀드가 있는데 무슨 펀드인지는 잘 모르겠고 지금은 반 토막 난 것 같던데”, “옛날에 친척이 권유해서 보험을 들어 줬는데 생명보험인지 저축보험인지도 모르겠고, 아직 유효한지도 잘 몰라.” 이 정도면 은퇴상담을 해봤자 제대로 된 은퇴설계를 기대할 수 없다.

요즈음은 예금이든 보험이든 주식이든 내 이름의 돈이 얼마나 되며 대출이 가능한지를 한 번에 알 수 있는 앱이 많다. 가입한 연금상품 정보는 금융감독원의 ‘통합연금 포털’에서, 다른 금융상품은 금융소비자정보 포털인 ‘파인’이나 금융감독원의 ‘내 계좌 한눈에’ 등을 찾아보면 된다.

클릭 한 번으로 ‘내 계좌 한눈에’ 홈페이지. [사진 payinfo.or.kr 캡처]


금융상식이 초등학생 수준인 남자 은퇴자들
은퇴 상담을 하다 보면 서로 딴 주머니를 차고 있는 부부가 적지 않다. 부부가 같이 상담을 받으러 왔다가 집에 갈 때는 싸우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부부간 재산정보 공유가 어렵다면 주로 돈을 관리하는 부인이 사전에 남편의 재산정보를 얻어낸 다음 은퇴 상담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가 대부분 연로하시기 때문에 당장 상속이나 증여를 받지 않더라도 부모님 재산에 대한 정보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세 번째는 은퇴 이후엔 ‘결정장애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실제 은퇴생활에 들어가면 노후자금이 많든 적든 쉽게 투자나 지출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금융지식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은퇴자금이 자녀 혼사나 사업 등의 굵직한 이슈와 복잡하게 연관되다 보니 가진 돈이 턱없이 모자라서다. 이런 것을 한꺼번에 생각하니 머리만 아프고 답은 안 보인다.

은퇴설계를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가정의 대소사에 대해 부부간에, 나아가서는 가족 내에서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 이런 사전 준비 없이 은퇴설계 상담을 하는 것은 마치 사주 보러 가서 생년월일시를 아무렇게 알려주고 사주를 보는 것과 같다.

은퇴하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정리하는 '버킷리스트'보다 먼저 '크레바스 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은퇴 설계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우리 가족의 재산현황 리스트를 만들고, 은퇴생활 중에 일어날 대소사에 관한 크레바스 리스트를 만들자. [사진 pixabay]

은퇴하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정리하는 ‘버킷리스트’보다 먼저 ‘크레바스 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녀가 결혼할 때 어느 정도 지원해 줄지, 내가 사업을 해보려고 할 때 최대 쓸 수 있는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지, 건강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등에 대해 체크리스트를 적어가면서 하나하나의 사안마다 부부가 같이 합의해 놓는 것이다.

건강검진처럼 은퇴 설계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우리 가족의 재산현황 리스트를 만들고, 은퇴생활 중에 일어날 가정의 대소사에 관한 크레바스 리스트를 만들자. 은퇴준비에선 은퇴설계도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사전준비를 잘하는 것이 제대로 된 은퇴설계의 시작이다.

다음 단계로 제대로 된 진단을 받아 보기 위해서는 어디서 어떤 내용의 은퇴설계 상담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김진영 은퇴자산관리연구소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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