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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되면 코끝이 찡, 지금도 눈물이 나요"

전지현 입력 2019.01.23. 17:06 수정 2019.01.28. 15:09
103세 최고령 현역 화가, 김병기 단독 인터뷰
한국 추상미술 이론 토대 만든
근현대 미술사 100년 산증인
지난해 폐렴으로 취소된 개인전
오는 4월 가나아트센터서 열어
감나무·황혼 그린 신작 발표
"아파도 작품 이야기 하면 기력 솟아
죽음도 삶의 일부, 무섭지 않다
친구 이중섭·유영국·김환기 떠나고
나만 홀로 살아남았지만
21세기 미술 정신 회복할 것"
김병기 화백이 서울 평창동 작업실 창문 너머 가나아트센터 황혼을 그리고 있는 캔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103세 현역 화가 김병기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캔버스에 붓질을 하고 있었다. 서울 평창동 주택 거실 창문 너머 가나아트센터(갤러리)를 그리고 있었다. 그와 악수를 하자 기자의 손에 노란 물감이 묻었다.

한 세기를 살아온 그는 "건물에 깃든 황혼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업대에는 마당에서 따온 감들이 메말라 있었다. 그 감들과 감나무를 각각 담은 화폭 2개가 벽에 걸려 있다. 고령에도 그의 붓은 부지런히 주변을 향하고 있었다. 지난해 폐렴으로 취소된 개인전을 오는 4월에 재개하기로 결정하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노화백은 "대작을 하려고 100호 캔버스 5개를 주문했다. 이번주 내에 도착할 것"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건강 상태를 묻자 "괜찮다. 뭐든지 질문하라.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정직하게 대답하겠다"고 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가 선생의 화업을 정리한 책 '백년을 그리다' 중 '100세가 넘으니 그림을 알 것 같다'는 문장이 눈이 띄더라.

▷옛날부터 그림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비슷하다.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면서 오늘날까지 나를 이끌어왔다. 원래 나는 상당히 부정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부정을 한 번 더 부정하니까 긍정이 된다. 그런 신념으로 살아간다.

―구체적으로 어떤 신념인가.

▷인생에 고락(苦樂)이 있지 않나. 고(苦)도 낙(樂)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감사한 것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봤는데 "죽음도 삶의 일부다"라는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나도 어느 날 죽겠지. 하지만 무서울 게 없다.

―4월 개인전은 어떤 작품으로 구성되나.

▷김이 새니까 미리 이야기 안 하겠다. 작년에 폐렴 때문에 전시를 취소했다.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인생은 약속대로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요즘은 어떤 그림을 그리나.

▷감과 감나무, 산의 동쪽 황혼…. 이건 또 하나의 시작이다. 그런데 시작이 작품일 수도 있다. 내가 의도하는 대로 세상이 작품을 알아주나. 1954년 그린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내가 49년간 미국에 있을 때 작가 미상으로 버려져 있다가 정수경 가톨릭대 교수가 다시 발굴해 중요한 보물로 취급됐다(그는 휴대폰을 가져와 이 그림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보여줬다).

―하루에 얼마나 그리나.

▷우문(愚問)이다. 마르셀 뒤샹(공장에서 생산된 기성 제품에 의미를 부여해 예술 작품으로 만든 프랑스 현대 개념미술 창시자)은 그림을 안 그리고 장기(체스)만 뒀다. 예술가는 노동자처럼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리지 않는다. 나는 며칠 안 그리다가 밤낮으로 작업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고희동, 김관호에 이은 세 번째 서양화가이자 영화 제작자, 미술품 컬렉터였던 김찬영이 부친이다. 아버지 영향으로 화가가 됐나.

▷그렇다. 유년 시절 나는 친어머니와 평양에 살았고, 아버님은 다른 어머니와 같이 서울에 살았다. 나의 부정 의식이 그런 환경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를 긍정하는 마음으로 한국전쟁 직전에 정성을 다해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모셨다.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가 평생 모은 고려 청자 등 골동품이 모두 불탔다.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주신 것도 뺏은 것도 하늘의 뜻이다.

―1944년 화가 이중섭, 문학수, 황염수, 윤중식 등과 평양에서 '6인전'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때 예술가 삶은 어땠나.

▷제약 투성이였다. 전람회 전에 일제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 그렇다고 그것을 피해서 다른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중섭과 문학수는 나와 같은 도쿄 유학생들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이상(시인)을 내 하숙집에 재우기도 했다. 내 침대를 내줬는데 다음날 아침에 "빗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하더라. 김환기는 도쿄 아방가르드 양화 연구소에서 만났다. 전남 신안 앞바다 섬사람답게 서정성이 있었다.

―한국전쟁 종군 화가 시절은 기억나는지.

▷1947년 월남한 나는 평양보다는 서울 사람에 가깝다.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에 국방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종군화가단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마동이 단장, 내가 부단장을 맡았다. 총 쏘는 장면보다는 한국전쟁 실상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주로 전선 광경을 그림에 담았다. 종군화가단 사무실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부산 용두산공원 부근 금강다방과 밀다원에서 모였다. 종군화가단 고희동, 노수현, 박노수, 서세옥, 권영우, 도상봉, 이마동, 윤중식, 황염수, 박득순, 한묵, 김흥수, 이준, 권옥연, 문학진 등과 전시도 열었다.

―19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한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정착한 이유는.

▷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국에 남았다. 한국에선 작품 하기 힘들었다. 감투나 쓰고 싸움이나 하고,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맡았던 나는 화단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울 후암동 언덕 위에 있던 우리 집이 불타는 바람에 정릉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아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대단한 용기와 배짱으로 미국에 남았다.

―미국 생활은 어땠나.

▷빈손으로 가서 생계가 힘들었다. 스키드모어 칼리지(뉴욕주 사라토가 스프링스에 위치한 사립 예술대학) 음악 선생이던 처제가 방문 교수로 초대해줘 동서미술 비교를 가르쳤다. 일대일 사교육도 하고 아키텍처(건축)와 메디컬(의학) 드로잉을 하면서 살았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후 이듬해 귀국해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이 마련해준 주택에서 지내고 있는데.

▷미국에서 49년 살았지만 한국 사람이 아닌 적은 없었다. 돈이 없어서 못 왔다. 내가 한국 추상미술 이론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김환기 점화에서 목탁 소리가 들려온다는 글을 내가 썼다. 떠날 때는 한국 산에 나무가 거의 없었는데 지금 우렁찬 숲을 이루고 있어 놀랐다. 한국인의 저력을 찬양하고 싶다.

―이중섭, 유영국, 변월룡과 동갑내기다. 가장 보고 싶은 친구는.

▷모두 똑같이 보고 싶다. 특히 이중섭은 평양 종로보통학교 짝꿍이었다.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 행려자로 세상을 떠난 이중섭 시신을 찾아 장례식을 치렀다. 화장을 해서 산과 망우리에 뿌리고 남은 유골은 일본 아내에게 보냈다. 이중섭이 김환기 집에 가면서 불러준 노래 '소나무야 소나무야'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이중섭 두 아들에게 가르쳐줬다.

―100년 넘게 살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오래 고민하다가 작품이 될 때 코끝이 찌르르 해지고 눈물이 난다. 그게 작품이 됐다는 하나의 신호다.

―가장 만족스웠던 작품은.

▷무수히 있다. 미국에서 아주 가난하게 마누라랑 같이 살 때가 좋았다. 자동차를 타고 사라토가 시골을 지날 때 풀이 바람에 나부끼는 게 감동적이어서 세필로 '바람이 일어나다'를 그렸다. 어쩌면 나는 풀의 화가다. 그 그림들이 미국 LA 아들 집에 있는데 이번 전시회에 가져오라고 했다.

―100세를 넘겨 좋은 점은.

▷어쩌다 103세까지 살았다. 세계 기록을 보면 100세를 넘은 현역 화가가 드물다. 피카소는 92세까지 그렸다. 작품을 오래 할 수 있어서 좋다. 작품을 하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다. 작품을 안 하는 것은 내가 죽은 것이다. 기력이 없어질 때 작품 이야기를 하면 힘이 솟는다. 작품은 내 삶의 전부다.

최근 완성한 유화 `메타포` (162.2×130.3㎝)
―남북한이 평화 무드다. 고향인 평양 땅을 다시 밟을 것 같나.

▷분명 내 머릿속 평양은 아닐 것이다. 남북 통일은 찬성하지만 북한식 통일은 반대한다(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여전히 평양냉면이다).

―역사에 어떤 화가로 기록되길 바라나.

▷21세기에 현대미술 양식만 남고 정신이 없어졌다. 나는 본래 추상화가였는데 형상을 도로 회복해 정신을 되찾고 싶다. 앤디 워홀도 메릴린 먼로나 코카콜라병과 같은 형상성으로 팝아트를 구축했다.

어쩌면 그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증언하려고 오래 산 게 아닐까. 그의 뇌에 활자가 낙인된 것처럼 기억이 또렷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대문으로 향하는 기자에게 "힘차게 사세요. 파이팅 하세요"라고 외쳤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 최고령 어른에게 그런 응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 He is…

△1916년 평양 출생 △1933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 수학 △1939년 일본 문화학원 졸업 △1950년 숙명여대 미술과장 △1954~1958년 서울대 미대 교수 △1964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1966년 미국 스키드모어 대학 초빙교수 △1967~1977년 미국 엠파이어 스테이트 칼리지 교수△201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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