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이후 어떤 '헌정 최초'를 쓸까

2019. 1. 2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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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검찰 혐의 입증 자료 대부분 인정돼 구속…
“재판부 안에서도 유무죄 논쟁 치열할 것”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7년 9월22일 퇴임식을 마친 뒤 대법원 청사 앞에서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 발부는 ‘사법 농단’의 주범이 다름 아닌 사법부 수장이라는 검찰의 주장을 법원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검찰 수사에 비판적인 보수 성향 법관들은 이번 사건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과욕이 부른 참사”로 규정했다. 한때 자신들의 ‘롤모델’이었던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 거래’나 ‘판사 사찰’을 지시할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 구속은 이들의 시각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수첩에 선명하게 남겨진 V자

양 전 대법원장이 2018년 6월1일 자신의 집 근처 공원에서 사법 농단 사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은 1월24일 새벽 1시58분에 발부됐다. 그의 영장심사를 담당한 서울중앙지법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범죄 사실 가운데 상당 부분 혐의가 소명이 되고 사안이 중대하며 주요 관계자들과의 관계 등에 비춰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전날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서울구치소에서 대기하던 양 전 대법원장은 영장 발부 직후 곧바로 수감됐다.

영장실질심사에서 검찰은 사법 농단 사태의 최종 책임자인 양 전 대법원장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양 전 대법원장은 법적 책임을 질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지만, 명 부장판사는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검찰이 밝혀낸 양 전 대법원장의 대표적 혐의는 박근혜 정부의 요구에 따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에 직접 개입한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은 이 재판의 주심인 김용덕 전 대법관에게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확정되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김 전 대법관은 재판 연구관에게 파기환송 논리를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또 대법관회의에서 외교부가 의견서를 낼 수 있게 민사소송 규칙을 바꾸고, 전범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한아무개 변호사를 여러 차례 만나 소송 대응 방안 등을 조언했다.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증거도 영장실질심사에서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검찰이 제출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의 업무수첩에는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사항이 자세히 적혀 있었고,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의 법관 이름 옆에는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V자를 표시한 게 남아 있었다. 명 부장판사는 이를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로 판단했다.

검찰은 2월12일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만기 전에 100명이 넘는 사법 농단 의혹 연루자 가운데 사법처리 대상을 선별해 일괄 기소할 방침이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구속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함께 재판받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구속영장이 한두 차례씩 기각된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기소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수뇌부의 뜻에 따라 일선 심의관들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린 혐의를 받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 등 고법부장급 판사들도 재판에 넘겨질 가능성이 크다.

2월 법관 정기인사 관심

양 전 대법원장이 2019년 1월11일 검찰 소환에 앞서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검찰은 애초 법원이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할 경우 심의관들을 포함한 소장 판사들까지 기소 대상을 크게 넓힌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영장 발부 직후 기소 대상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이는 유죄 입증에 자신 있는 핵심 인물로 기소 대상을 한정해 재판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재판에서도 검찰의 전략이 통할지는 불확실하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될지는 재판을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나온다. 한 법원 출신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고등부장급 판사들 가운데는 여전히 직권남용으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가진 이가 꽤 있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젊은 판사들은 사법 농단 관련자의 형사처벌 가능성을 높게 보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재판부 안에서 유무죄 의견이 충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판사는 “사법 농단 재판은 검찰과 피고인 간의 법정 공방뿐 아니라 재판부 안에서 벌어질 유무죄 논쟁도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2월에 있을 법관 정기인사에서 서울고법 형사재판부 소속 판사 인사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린다. 법원 관계자는 “지금 서울고법 부장판사들 가운데는 양 전 대법원장과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이가 많다. 이들은 양 전 대법원장의 항소심 재판을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이번 인사에서 대폭 교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전임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7시간 뒤인 1월24일 오전 9시께 출근하며 두 번이나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는 “참으로 암담하고 부끄럽다. 어떤 말씀을 드려야 우리의 마음과 각오를 밝히고, 국민 여러분께 그나마 위안을 드릴 수 있을지를 저는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어 “다만 저를 비롯한 사법부 구성원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겠다. 그것만이 우리가 어려움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고,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의 바람대로 사법부 개혁의 계기가 될지에 판사들의 전망은 엇갈린다. 한 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재판 필요성을 인정할 정도라면 증거가 상당히 확보된 것으로 봐야 한다. 검찰 수사에 비판적인 법관들이 있지만, 갈등으로 번질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부끄러운 역사로 남게 됐지만 사법부 반성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고위직 판사는 “법원 안에서 후배 판사들과 이 문제로 대화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 이런 갈등이 앞으로 상당 기간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71번째 생일을 구치소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1월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법조인들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대국민 신뢰 회복에 전념할 것을 이구동성으로 주문한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지금까지 김 대법원장이 내놓은 법원행정처 개혁안 등은 대부분 판사들의 관심사일 뿐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재판받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법조인은 “이용훈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강조했던 공판중심주의 재판과 국민참여재판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양승태 사법부는 상고법원 도입에 몰두하느라 공판중심주의를 소홀히 했다”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71번째 생일을 구치소에서 맞게 됐다. 인명사전에는 그의 생일이 1월26일로 돼 있다. 그는 ‘법원 내 하나회’로 알려진 ‘민사판례연구회’(민판연)에도 일찌감치 가입하고 법원행정처 송무국장과 사법정책실장, 서울고법 부장, 서울지법 수석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법관이 된 뒤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에 발탁됐다. 판사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그는 앞으로 후배 판사들 앞에서 유무죄를 다퉈야 할 운명을 맞았다. 그의 법정 싸움은 길고 외로울 것이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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