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분쟁, 미국은 왜 보고만 있을까

입력 2019. 1. 25. 20:06 수정 2019. 1. 2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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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1996년 6월4일 하와이 부근 해상에서 열린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림팩)에 참가한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 ‘유기리’의 20㎜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1분에 3000발을 뱉어내는 무자비한 포격에 미국 해군의 공격기가 추락했다. 항공모함 ‘인디펜던트’에서 날아오른 이 공격기는 훈련용 표적을 매달고 접근하던 중이었다. 유기리가 표적 대신 예인기를 향해 기관포를 쏘아댄 것이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악몽’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한국 누리꾼들이 ‘자위대 안습 전설’이라며 자위대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들을 모아놓은 곳에 가면 이 사건이 감초처럼 등장한다. 일본 누리꾼들이 ‘방위불상사’라며 자위대의 황당한 행태를 꼬집는 곳에도 어김없이 올라온다. (일본 누리꾼들은 한국군의 엉뚱한 실수나 황당한 사고를 묶은 곳에 ‘한국군의 법칙’이란 이름표를 붙인다.)

또다른 악몽이 이어졌다. 해상자위대는 유기리의 사격 실수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 기관포의 자동사격 시스템 결함 가능성 등을 내비쳤다. 그러나 조사 결과 처음부터 기관포가 예인기를 조준하도록 설정돼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진짜 문제는 화력관제 지휘관의 실수와 중간에 이를 고치지 못한 맹목적인 명령-복종체계였다. 진실을 일찌감치 고백하지 않은 해상자위대에 대한 신뢰는 더욱 추락했다.

일본 해상초계기가 지난해 12월20일 ‘광개토대왕함’으로부터 추적레이더(STIR)를 조준당했다고 일본 정부가 항의하면서 불거진 한-일 갈등이 한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지난 23일 ‘대조영함’이 일본 초계기로부터 위협비행을 당했다고 국방부가 발표한 뒤부터는 분쟁의 수준으로 올라갔다. 이런 상황이면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일본 해상자위대와 한국 해군 가운데 누군가는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양쪽이 내놓은 증거를 보면, 일본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본 방위성은 21일 초계기가 포착했다는 ‘화기관제 레이더 탐지음'을 공개했다. “삐~” 소리가 18초가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이 탐지음은 표적을 지향하는 추적레이더의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추적레이더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탐지했다는 기본적인 정보가 없다. 국방부가 24일 공개한 대조영함의 레이더 화면 사진은 그에 비하면 구체적이다. 레이더 화면에는 일본 초계기가 60~70m 고도로 날아와 대조영함 오른쪽으로 540m까지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수치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러나 이번 분쟁이 어느 한쪽의 증거 제시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와야 다케시 일본 방위상은 “한국이 공개한 사진을 봤다”면서도 초계기의 위협비행을 부인했다.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일본 방위성이 앞서 한국과 협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부터가 증거 제시와 검증을 통해 사실관계를 밝힐 의지가 없다는 신호다. 범행을 증명하는 ‘스모킹 건’이 나온다 할지라도 법정에 설 수 없을 것이다.

유기리의 진실이 드러난 건 피해자인 미국이 일본과 함께 곧바로 현장조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일동맹의 요구가 신속한 조사와 평화로운 수습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번 한-일 분쟁에서 한-미-일 협력의 중심축인 미국은 관찰자로 머물러 있다. 상황이 악화하면 우발적인 충돌로까지 번질 수 있는데도 대화와 협력이란 의례적인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나 2016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과정에서 한-미-일을 묶으려는 의도를 강하게 투사했던 미국의 태도에 비춰보면 놀라운 변화다.

미국의 세계지도는 중국을 겨냥해 그려지고 있다. 북핵 문제가 외교적 협상 과정에 들어서면서 동북아시아 전략의 초점도 북한에서 중국으로 옮길 환경이 넓어졌다. 대북 차원에서 한-일 관계를 관리해야 할 부담이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을 지구적 차원에서 견제하기 위해선 미-일 동맹을 인도·태평양으로 확장해야 한다. 한-일 분쟁이 이런 구상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미국은 인내력을 발휘할 공산이 크다. 미국의 ‘전략적 인내’ 속에서 한-일 간에 군사적 갈등이 돌출하고, 증거물이 오가지만, 신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분쟁의 시대’가 오고 있다.

유강문 선임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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