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주 4회 재판.. 변호사들 "8만쪽 수사기록 어찌 다 보나"

양은경 법조전문기자 2019. 1. 29.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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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박 前대통령 이어 임종헌 前행정처 차장도 '몰아치기 재판'

형사재판은 보통 2~3주에 1번 열린다. 규모가 큰 사건도 일주일에 1~2번 정도다. 그런데 2017년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 재판 때 재판 횟수가 크게 늘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일주일에 3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일주일에 4번 재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 측은 "방어권을 무력화하는 몰아치기 재판"이라고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週) 4회 재판은 변호인은 물론 판사에게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변론 준비 하기도 빠듯하고 재판 끝나고 수사·재판 기록 읽기도 벅찰 수밖에 없다.

주 4회 재판이 또 등장한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이다. 이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는 임 전 차장의 첫 재판을 오는 30일 연다. 다음 재판은 설 연휴 직후인 2월 11일(월요일)에 열린다. 이때부터 매주 월·화·수·목요일에 재판을 연다. 임 전 차장 변호인단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변호인 전원이 사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임 전 차장의 구속 재판 기한인 올 5월 14일까지 재판을 끝내려고 주 4회 재판을 하는 것 같다"며 "피고인의 방어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고 했다.

임 전 차장에 대한 검찰 수사 기록은 8만 쪽이다. 아직 기록 검토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주 4회 재판은 살인적인 스케줄"이라며 "변호인단은 방대한 검찰 수사 기록을 꼼꼼히 다 봐야 하고 이를 토대로 거의 매일 이어질 증인 신문(訊問) 질문지를 만들고, 각 재판 기일별 쟁점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한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변호사들은 여러 개 사건을 동시에 맡아 진행하는데, 주 4회 재판을 하면 검찰 측 주장을 반박할 증거를 수집하거나 증인을 물색할 시간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문제점은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그의 변호를 맡은 채명성 변호사는 최근 펴낸 저서에서 "주 4회 재판을 하면서 12만 쪽이나 되는 검찰 기록을 파악하고 의견서를 작성하며 증인 신문 사항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며 "재판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선 모든 변호인이 모든 재판에 출석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나, 시간 확보를 위해 번갈아 가면서 출석했다"고 썼다. 주 3회 재판을 받았던 이재용 부회장도 재판 때 조는 모습이 목격됐다. 작년 초 뇌물 수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재판부에 "주 4회 재판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법원이 주 4회 재판을 하는 주된 이유는 구속 재판 기간(심급별 각 6개월) 안에 선고를 내리기 위해서다. 법원의 오랜 관행이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주요 사건 피의자 재판을 6개월 안에 못 마치고 석방을 하면 여론의 반발이 생길 수 있고, 피의자 도주 우려 등의 부담을 상급심으로 떠넘겼다는 눈총을 받을 수 있어 재판을 서두르게 된다"고 했다.

형사소송법이 구속 재판 기한을 두고 있는 이유는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헌법재판소도 1999년 구속 기간과 관련된 위헌제청 사건에서 "형소법 조항은 구금의 부당한 장기화로 피고인의 신체 자유 등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지 신속한 재판 실현을 목적으로 한 규정이 아니다"라며 "법원이 (구속 재판 기한 후에도) 심리를 더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구속을 해제한 다음 재판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런데 법원은 이 조항을 '6개월 안에 재판을 마쳐야 한다'는 몰아치기 재판의 근거로 활용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주 4회 재판은 공격하는 검찰에만 유리하다. 헌법상 정당한 재판 받을 권리의 침해"라고 했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장은 "주 4회 재판을 하면 변호인들이 기록 검토할 시간도 없다. 재고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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