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겨레

"죽거들랑 나비처럼 날고 싶다"던 아흔셋 평화운동가 김복동

입력 2019.01.29. 17:16 수정 2019.01.30. 18:16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아흔셋 전시 성폭력 생존자이자 평화운동가였던 김복동의 삶
1992년 '위안부' 피해 증언..분쟁지역 성폭력 국제사회 여론 이끌어
일본 정부 사과를 받지 못한 채 끝내 눈 감아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이자 평화운동가인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모습.

1926년생 김복동.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4학년을 마치고, 열다섯까지 집안일을 도우며 지냈다. “세월이 수상하니 나다니지 말라”고 한 어머니 말씀 때문이었다. 1941년 봄인지 가을인지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계급장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 사람들이 동네 구장과 반장을 앞세우고 집에 찾아왔다. “군복 만드는 공장에서 3년만 일하면 된다.” 열다섯 김복동이 안 가면 식구들을 추방하고 재산도 뺏는다고 했다. 공장 가서 설마 죽기야 할까. “엄마, 내가 갈게.” 열다섯 김복동은 그 길로 대만을 거쳐 중국 광둥의 어느 부대에 갔다. 그때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흔셋 김복동의 삶은 조금 달랐을까.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피해자이자 평화운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 28일 밤 10시41분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향년 93.

“난 평생 정이라곤 줘본 적이 없어.”(<한겨레> 2014년 2월22일치, ‘이진순의 열림’) 열다섯 김복동은 토요일은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요일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평일에는 주말에 못 온 사병들을 상대해야 했다. 광둥을 거쳐 홍콩,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자바, 방콕, 싱가포르까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트럭에 실려 다녔던 8년 동안 일본군 성노예로 살았다.

1992년 예순여섯 ‘생존자’ 김복동이 정부에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할 때까지, 가족·친지 누구도 그가 “거기” 갔다 온 걸 알지 못했다. 해방 뒤 겨우 살아 돌아온 스물셋 김복동에게서 차마 상상도 못 할 일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평생 혼자 가슴앓이를 하다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해방 이후 1992년 그날까지, 자식도, 남편도 없이 부산에서 장사를 하며 혼자 지냈다. “벌어서 살기 답답한 사람들 다 퍼주고 할 때”는 마음이 좋았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며 얼굴이 알려진 뒤에는 이웃 주민들과는 관계가 소원해졌다.

“맨날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테레비고 신문이고 입이 아프도록 죽도록 말해 놓으면 그 말은 다 어디 가삐고 한두 마디 나오고 그저 ‘김복동 위안부’, ‘위안부 김복동 할매’… 이기 머, (내가) 위안부라고 선전하는 거밖에 더 되나 말이다. 안 그래?”(<한겨레> 2014년 2월22일치, ‘이진순의 열림’) ‘생존자’ 김복동은 짐짓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 볼멘소리는 대부분 생존하지 못했거나 익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용기를 상징했다.

예순여섯에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은 ‘생존자’ 김복동을 평화운동으로 이끌었다. 김복동은 유엔,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전쟁 없는 세상’을 외쳤다. 자신과 같은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또 다시 생기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이 예순여섯 김복동을 추동했다. 콩고와 우간다 등 세계 각지의 무력분쟁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생존자’ 김복동의 호소는 국제사회를 흔들었다.

“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지만, 그래서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서서 우리에게 명예와 인권을 회복시키라고 싸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2012년 3월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나비기금 설립 기자회견에서)

2015년 여든아홉 ‘생존자’ 김복동은 분쟁지역 피해 아동 지원과 평화활동가 양성에 써달라며 평생 모은 돈 5000만원을 ‘나비기금’에 기부했다. 나비기금은 이 돈으로 ‘김복동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같은 해 평화운동가 김복동은 국제 언론단체가 선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과 함께 이름을 새겼다.

29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빈소와 할머니 영정. 윤미향 정의기억재단 이사장 페이스북 갈무리

“단결해야 돼. 단결해서 일본한테 이겨야 돼. 2차 대전 때 젊은 청년들을 모조리 일본 이름으로 싹 바꾸고 완전한 일본 사람으로 만들고… 그렇게 끌고 가서 희생을 당했던 우리 민족이 지금도 그 나라에서 설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듣고 너무 한심스러워서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 조선학교는 조선 사람이 협조를 안 하면 누가 협조를 하나? 한 사람이라도 훌륭한 조선 사람을 키우고 싶어.”(총련계 일간지 <조선신보> 2019년 1월17일치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평화운동가 김복동에게는 재일동포 또한 남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인지 일본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재일조선학교를 유독 안타까워했다. 2016년부터 재일조선학교 학생 6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던 김복동은 지난해 11월22일 신촌 세브란스 병실에서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라며 3000만원을 더 내놓았다. 지난해 공익사단법인 정(이사장 김재홍·김용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아픔을 안고 있으면서도 거의 전 재산을 후진교육을 위해 기부했으며 평화와 통일의 신념과 한일 과거사에 대한 바른 역사관을 전파한” 아흔둘 김복동을 ‘바른의인상’ 첫 수상자로 선정했다.

“우리가 크게 사죄하라고 하는 게 아니네. 자기네(일본)가 (위안부를 강제동원)했다고 인정하고 기자들을 모아놓고 용서해달라고 하면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거 아닌가.”

2018년 9월3일. 아흔둘 ‘생존자’ 김복동은 휠체어를 타고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뱃속에 퍼진 암 때문에 복강경 수술을 받은 지 5일 만이었다. 말은 끝나지 않았다.

“늙은 김복동이가 ‘하루라도 서로 좋게 지내려면 아베가 나서야 한다’고 얘기한다고 신문에 내줘. 해볼 수 있겠나?” 평화운동가 김복동은 현장에 취재를 온 <아사히신문> 다케다 하지무 특파원에게 ‘이 이야기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잘 전달하라’ 신신당부했다. 다케다 기자는 “노력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아흔셋 김복동이 눈을 감은 지난 28일, 아베 총리는 시정연설에서 이례적으로 한·일 관계에 대한 언급을 빠트렸다. 아베 총리에 이어 외교연설에 나선 고노 다로 외상은 “일·한 청구권 협정,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한 합의 등 국제적 약속을 지킬 것을 (한국에) 강하게 요구한다”고 말했다. 2015년 12월28일 양국의 합의가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는 기존 입장의 재확인이다.

“아니. 나는 죽거들랑 불에 태워서 훨훨 뿌려주라고 했어. 누가 돌볼 거라고 묘를 만드나. 그래서 저 산에 훨훨… 물에다 던지면 물귀신 된다니, 산에다 뿌려주면 훨훨 나비가 되어서 온 천지 세계로 날아다니고 싶어.(웃음)”(<한겨레> 2014년 2월22일치, ‘이진순의 열림’)

아흔세살 전시 성폭력 생존자이자 평화운동가였던 김복동은 세상과 이별하기 5시간 전 온몸을 쥐어짜 마지막 유지를 남겼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줬으면 좋겠다.” “재일조선학교 지원을 맡길 테니 열심히 해달라.”

“죽거들랑 훨훨 나비가 되어서 온천지 세계로 날아다니고 싶다”던 김복동은 지금 어느 하늘을 날고 있을까.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