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6000km 달린다..사향노루 쫓는 그 남자
"내 머릿속엔 포유류 지도가 들어있지요"
지난 29일 강원도 화천군의 한 폐광.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 도로는 뒷산 폐광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150m가량 걸어 들어간 폐광 갱 천정에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물 I급인 붉은박쥐(일명 황금박쥐)가 세 마리가 눈에 띄었다. 특유의 붉은 색이 선명했다.
한 박사는 "2년 전에 왔을 때는 한 마리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숫자가 늘어난 것은 반가운 소식"이라면서도 "폐광 입구가 넓은 광장처럼 다져지고 전봇대로 새로 들어선 게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국보' 같은 현장 생태학자
그는 지난해 5월 국립생물자원관 연구관 직(職)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개인 자격으로 전국을 누비며 자유롭게 연구하고 있다.
강원도 화천부터 경북 구미와 김천, 울산, 경남 합천·거창, 전남 함평 등 전국 곳곳을 다닌다.
한 달에 그의 차로 달리는 거리만 5000~6000㎞에 이른다.
그의 머릿속에는 국내 포유류와 조류 분포 지도가 들어있다.
언제 어디에 어떤 종이 나타나는지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이다.
경희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그는 1997년 환경부 생태조사단 일원으로 포유류 생태 조사를 시작했다. 이후 20년 넘게 현장에서 국내 포유류 연구를 이끌고 있다.
국내에서 멸종위기 포유류를 연구하는 학자가 드물다.
한 박사 자신이야말로 천연기념물이자, 국보이자, 멸종위기종인 셈이다.
표범 흔적을 추적하다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멸종위기 종인 사향노루·곰의 분포를 조사하는 일이다.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정확한 서식 실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한 박사는 "2015년 초 강원도 화천에서 실제로 사향노루가 밀렵 되는 것을 목격했다"며 "멸종위기종의 분포와 생태를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보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 박사는 자신이 화천 지역에서 무인카메라로 촬영한 사향노루 영상도 보여줬다.
영상 속의 사향노루는 암컷과 새끼가 함께 걷고 있었고, 수컷은 무엇에 놀란 듯 카메라를 향해 뛰어왔다.
사향노루는 천연기념물 제216호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이다.
오래전 신문 기사를 검색해 표범이 목격됐던 지역을 찾아다니며 마을 주민 노인들의 증언을 청해 듣는다.
호랑이는 멸종됐지만, 표범은 남한 어딘가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세 번째는 지방자치단체나 환경단체 등에 야생동물과 관련된 사항을 자문한다.
전국 곳곳의 생태학자들과 직접 만나거나 전화·문자·메일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한다.
"두루미 네트워크 추진 "
소신 지키려 편안함 버려
99년 환경부 생태계 조사단을 그만둔 것도 강원도 영월에 동강댐을 건설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98년 생태계 조사단은 현장 조사 후 환경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석회동굴·습곡 등 특이한 지형이 모든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희귀조류인 비오리·원앙의 국내 최대 번식지여서 학술 가치가 높다" 며 "이 일대를 보전·관리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남한에서 관찰하기 어려운 희귀한 지질현상과 뛰어난 경관을 갖고 있어 단기적 이용보다는 장기적인 환경문제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시범 사업으로 곰을 방사했는데, 연구 기간이 끝나자 다들 뒤로 물러앉는 바람에 갑작스레 '구원 투수'로 등판하게 됐다.
한 박사는 지리산에서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곰 복원 사업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2006년 방사한 곰 한 마리를 재포획하는 과정에서 올무에 걸려 죽는 일이 생겼고, 한 박사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한 박사는 "올무에 걸린 곰을 제때 발견해야 하는데, 부하 직원이 시간을 놓쳤다"며 "곰 복원사업이 전체적으로는 잘 진행되고 있었기에 내가 없어도 잘 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수달·사향노루에 빠지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는 국립생물자원관에서 척추동물연구과장, 동물자원과장 등을 지내며 비무장지대 생태계 조사, 북한산 멧돼지 조사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다 2016년 사향노루 조사를 위해 민통선 지역에 설치한 무인카메라가 문제가 됐다.
무인카메라에 밀렵 장면이 포착됐고, 한 박사는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밀렵 혐의를 받던 지역 주민은 경찰 조사에서 "한 박사가 무인카메라를 민통선 안에 무단으로 설치했다"고 지적했고, 이번에는 한 박사가 경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한 박사는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초소 남쪽에 설치했는데, 군부대 측이 군사시설보호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지만, 결국 기소 유예됐다"고 말했다.
2017년에는 현장 조사를 도와주던 임시 직원이 다치기도 하고, 진드기에 물려 병을 얻는 일도 생겼다.
임시 직원이라 국립생물자원관에서는 병원비를 지원할 수가 없었다.
한 박사는 이들을 도우느라 출장비를 전용했는데, 공직 사회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책임을 지고 생물자원관을 떠났다.
다시 야인으로 돌아오다
한 박사는 "현장에서 포유류 생태를 제대로 연구하는 전문가가 국내에는 드물다"며 "우리 같은 생태학자들이야말로 멸종위기"라고 농담도 했다.
야생 동물 보호와 관리에서 전문가가 있어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체계적인 보호와 관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와 지자체, 전문가, 일반 시민들이 각자의 몫을 책임져야 한다"며 "과거보다는 정부 지원이 많이 늘어났지만, 아직도 부족한 상태"라고 말했다.
화천·철원=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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