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중앙일보

딸은 아빠 몰래 한국 갔다..요즘 일본 '혐한 세대갈등'

이영희 입력 2019. 02. 03. 11:01 수정 2019. 02. 03. 11:36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일본 가정서 한국에 대한 인식차로 부모-자녀 대립
중장년층, 정치 갈등에 영향 받아 '혐한(嫌韓)' 강화
어릴 적부터 한국 문화 즐긴 자녀 세대는 영향 적어
일본의 한 국립대에 다니는 20세 여성 A씨는 한국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의 열혈 팬이다. 그는 이번 겨울 방학, 혼자 한국 여행을 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혔다. 여행 계획을 고향 집에 알리자 좀처럼 연락하지 않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와 “여행을 취소하라”고 한 것. “한국은 신용 할 수 없는 나라다. 혼자 여행을 하다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지난 해 11월 13일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열린 일본 도쿄돔 공연장 앞에서 여고생 팬들이 '손가락 하트'를 그리며 방탄소년단을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방의 전자기기 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는 A씨의 아버지는 예전엔 집 근처 공장에서 일하던 한국인과 중국인 직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한국을 비난하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딸.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최근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 사이에 일어났던 초계기 레이더 문제를 언급했다. 그리고 말했다. “취소 비용은 내줄 테니 여행은 가지 말아라. 가능하면 한국인과는 깊이 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관련 판결, 초계기 레이더 갈등 등으로 한일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일본 가정 내에서 부모와 자녀가 한국에 대한 인식 차이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일본 시사주간지 아에라(AERA)가 지난 달 28일자에서 보도했다.

그동안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중립적이었던 중·장년층들의 태도가 정치적 문제에 영향을 받아 급격히 악화하는 반면, 한국 문화에 익숙한 젊은이들의 인식 변화는 그만큼 크지 않은 게 이유다.
지난 해 12월 5일 광주 동구 광주고법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의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잡지에 소개된 또 다른 20대 여성 B씨는 지난 1월 1일,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 아버지와 언쟁을 벌였다. 62세의 아버지가 TV에서 나오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뉴스를 보다 불쑥 “한국인은 언제까지 일본에 사죄하라고 할 건지, 정말 바보 같다”는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판하는 한 TV 출연자를 향해 “저 녀석은 재일한국인이야”라고 했다.

“재일한국인이 뭐가 어때서?” 참지 못한 딸이 반박했고, 아버지는 “저놈들은 일본을 싫어해”라고 했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과 사귀고 있는 딸은 유독 한국 문제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대화 후 확실히 아버지와의 사이에 감정적 골이 생겼다”고 말했다.


K팝, 한국 음식에 빠진 밀레니얼 세대
한국에 대한 세대 간 인식 차이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한국 동아시아연구원과 일본 싱크탱크 겐론(言論)NPO가 지난 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답한 일본인은 2017년보다 4%포인트 줄어든 22.9%(‘좋지 않은 인상’은 46.3%)로 나타났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상대국에 대한 인상. [자료: 동아시아연구원]
전체적으로 낮은 수치지만 밀레니얼 세대인 10~20대와 부모 세대의 생각 차는 확연했다. 20대 미만에서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37.5%인 반면, 50대에선 27.7%였다. 20대 미만의 경우, 한국에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 2014년엔 18.2%에서 2016년과 17년에는 40% 넘게 올랐다가 지난해 다소 하락했다.
이는 2015년경 시작된 일본의 ‘3차 한류붐’과 관련이 있다고 일본 언론들은 보고 있다. 이 시기부터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등의 노래가 일본 젊은이들에 퍼져나갔다. 한국 여성들의 화장법이 ‘얼짱 메이크업’이란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고, 한국 화장품의 대일 수출액은 급상승했다. 도쿄의 코리안타운인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시작된 ‘치즈 핫도그’나 ‘치즈 닭갈비’는 현재 일본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해 12월 22일 도쿄 하라주쿠의 한국식 치즈 핫도그 매장앞에 줄을 선 인파들. 서승욱 특파원
이렇게 문화를 통해 한국에 친밀함을 갖게 된 세대는 역사나 정치 문제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는다. 아버지의 반대를 뒤로 하고 몰래 한국 여행을 다녀왔다는 A씨는 “우리 세대는 어릴 적부터 K팝이나 한국 드라마를 일본 음악이나 드라마에 뒤지지 않는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즐겨왔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은 어느 쪽이 위나 아래가 아닌 대등한 나라라고 태어났을 때부터 인식해 왔어요. 지금의 우리에게 한국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반말하는 동생 보는 기분”

반면 이들의 부모 세대인 50대 이상의 일본인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은 상당 부분 과거에 머물러 있다. 한국 유학 경험이 있는 한 신문 기자는 아에라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한일관계를 “갑자기 반말을 하는 동생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형”에 비유했다.
지난 해 12월 9일 일본 우익세력이 도쿄 번화가인 긴자(銀座)에서 욱일기(旭日旗) 등과 함께 '일한(日韓) 단교'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혐한(嫌韓)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60~70년대의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미성숙했고, 고도 성장을 이룬 일본을 아시아의 선진국으로 우러러보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한국이 삼성으로 대표되는 휴대폰 등의 가전, K팝 등의 예능 분야에서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추월하는 존재가 됐다는 것에 (일본 중장년층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겁니다. 한국 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일본과 대등한 입장으로 발언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불쾌하죠.”

이처럼 일본 세대 갈등의 주요 쟁점이 된 한일관계, 과연 개선의 길이 있을까. 아에라는 이런 혼란 하에서 양국이 지금처럼 자국의 정당성만을 주장해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이어 1998년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와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던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이 말을 인용하며 양국 리더들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