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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총리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입력 2019.02.03. 16:06 수정 2019.02.03. 23:56
1인자 문턱에서 좌절했던 '총리 잔혹사'

자유한국당 당대표 레이스에 뛰어든 황교안 전 총리의 기세가 무섭다. 지난달 21일부터 25일까지 <오마이뉴스>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17.1%를 기록해 1위에 오른 것이다. 이낙연 총리가 15.3%, 오차범위 안에서 2위를 차지해 박근혜 정부의 총리와 문재인 정부의 총리가 선두를 다투는 모양새다.(성인 남녀 2515명 대상.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0%p.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3년여 남은 2022년 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총리 징크스’가 깨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 국정의 2인자인 총리는 대통령에 버금가는 높은 인지도를 얻게 된다. 차기 대선주자의 반열에 오르며 주목받은 총리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총리가 대통령이 된 경우는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뒤 그 자리를 8개월 동안 승계했던 최규하씨가 유일하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뒤 대통령이 된 총리는 한 명도 없다. ‘큰 꿈’을 꾸었다가 허망하게 접은 사례도 있다.

■ 포스트 박정희, 3당 합당, DJP 연합…원탑 꿈꿨던 ‘영원한 2인자’ 김종필

1971년 9월, 서울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취임 뒤 첫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종필 총리. 운정재단 홈페이지

국무총리를 2차례나 지낸 김종필은 ‘영원한 2인자’의 대명사다. 박정희의 조카사위였던 김종필은 1961년 5·16 쿠데타에 참여해 ‘혁명동지’가 됐다. 박정희 정권의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이어 총리까지 지낸 그는 일찌감치 박정희의 뒤를 이을 ‘차기 대통령’으로 꼽혔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는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잃을까 항상 전전긍긍했고 김종필은 정계은퇴와 원치 않은 외유도 떠나야 했다. 1979년 애증의 관계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아예 정치 활동이 금지됐다. 그러나 김종필은 1987년 직선제 개헌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정계에 복귀했고 1990년엔 노태우·김영삼과 3당 합당을 성사시키며 다시 ‘권력의 양지’로 나오게 된다.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뒤 양김(김영삼·김대중)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그는 내각제 개헌을 꿈꿨다. 대통령이 아닌 총리 자리를 쟁취해 ‘1인자’가 되려는 강력한 권력의지였다. 결국 그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김대중 후보와 손을 잡아 정권교체에 공을 세웠고 김대중 정부의 초대 총리가 됐다. 그러나 국정 수행 과정에서 갈등이 누적되고 디제이피(DJP) 연합이 파기되면서 내각제 개헌도 물거품이 됐다. 김종필은 ‘영원한 2인자’였다.

■ 노무현 한 마디에 무너진 고건, 노무현 지키려 뛰어든 이해찬

2007년 1월 대선 불출마 선언을 위해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을 찾은 고건 전 총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 기자회견장에 내리려다 지지자들이 앞을 막아서자 눈을 감은 채 착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총리, 노무현 정부의 첫 총리였던 고건은 2006년 11월 중도실용개혁을 표방하며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의 대선 출마 선언이었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포용 정책’을 비판하며 노 대통령과 차별화에 나섰지만 그의 정치 인생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12월 “고건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라는 노 대통령의 직격탄에 비틀댔고 ‘제3지대 헤쳐모여’를 결의했던 여야 정치인들은 아무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정계에 뛰어든 지 2개월 만인 2007년 1월 “대결적 정치구조 앞에서 저의 역량이 너무나 부족함을 통감한다”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며 황급히 무대를 내려왔다. 총리 2번, 광역단체장 2번, 장관 3번을 거친 ‘행정의 달인’이었지만 권력투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에게 정치와 대선은 너무 버거운 숙제였다.

참여정부 시절 총리였던 이해찬·한명숙은 대선 출마를 위해 당내 경선에 나섰다. 예비경선을 통과한 한 전 총리는 이 전 총리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를 사퇴했다.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은 손학규-이해찬-정동영 3자 대결로 압축됐으나 최종 승자는 정동영 의원이었고 이 전 총리는 3위로 경선을 마감했다. 당시 두 전직 총리의 경선 도전은 대통령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참여정부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반박하기 위해 차출된 상황이었다. 경선 패배 뒤 이 전 총리가 상심한 측근에게 “내가 정말 될 줄 알았냐”며 ‘위로’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 ‘제왕적 총재’ 이회창의 성공과 실패

1997년 7월 신한국당 대선 경선 모습. 왼쪽 둘째부터 이인제, 이수성, 이회창, 최병렬, 이한동, 김덕룡 후보. 청와대사진기자단

김영삼 정부 시절 이회창·이홍구·이수성 총리는 신한국당의 대선주자 그룹인 ‘9룡’의 한 축을 담당했다. (나머지 ‘6룡’은 박찬종,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김윤환 이한동) 그러나 이홍구 전 총리는 신한국당 대선경선 직전인 1997년 6월 “광범위한 국민적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울대 총장 출신 ‘마당발’이었던 이수성 전 총리는 끝까지 남은 후보 6인 중 5위로 경선을 마쳤다.

이들과 달리 이회창 전 총리는 치열했던 신한국당 대선 경선의 승자가 됐다. 대법관을 지낸 ‘엘리트 판사’였던 이 전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이 발탁한 인사였다. 감사원장에 이어 총리에 오르면서 ‘대쪽’ 이미지로 주목을 받았다. 연이은 발탁에도 이 전 총리는 대통령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총리의 헌법상 권한을 놓고 김 대통령과 갈등을 빚으며 4개월 만에 물러났다. 대통령과의 ‘차별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총리에서 물러난 지 1년 9개월 만인 1996년 1월,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했다. 15대 총선을 치를 새 인물이 필요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총선 3개월 전 입당한 그는 선대위원장을 맡아 총선을 치렀고 다음해 3월 당대표에까지 오른다. 대중적인 인기와 김영삼 대통령의 지원에 기반해 그는 당에 안착했고 특유의 카리스마로 당을 장악했다. 8룡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는 당선이 유력한 여당의 대선후보 자리까지 거머쥐게 됐다.

그러나 이 전 총리의 정치적 시련은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부터 시작됐다. 아들의 병역 기피 의혹이 불거지면서 ‘대쪽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고 외환위기로 김영삼 정부 인기는 폭락했다.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한 이인제 후보의 탈당 뒤 독자출마도 뼈아팠다. 결국 이 전 총리는 ‘디제이피(DJP) 연합’으로 지역연합을 구축한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에게 1.6% 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2002년 12월 대선후보 3차 토론회 모습. 왼쪽부터 권영길, 이회창, 노무현 후보. 공동취재사진

이 전 총리는 자신의 패배로 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을 빠르게 수습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시 공고히 했다. 2000년 총선 때는 ‘물갈이 공천’을 단행해 ‘이회창당’으로 재편했다. ‘제왕적 총재’였던 그에게 당내 적수는 없었다. 그의 2002년 대선 출마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혜성 같이 등장한 노무현 후보에게 또 패배했다. 대권 재수에 실패한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 전 총리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07년 11월 그는 “정직하고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지도자만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국민의 힘을 모을 수 있는데 지금 국민은 한나라당 후보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며 대선 출마를 또 선언했다. 다스·도곡동땅·비비케이 등 온갖 비리투성이인 이명박 후보로는 안된다는 명분이었다. 3번째 도전은 단기필마 무소속 출마였지만 이 전 총리는 15.1%를 득표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총리였다.

■ ‘안 써본 카드’ 황교안의 미래는?

황교안 전 총리가 29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당대표 출마 회견을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엘리트 판사’, ‘제왕적 총재’였던 이회창도 가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 ‘대통령이 된 국무총리’는 가능할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총리가 국민들에게 ‘진짜 지도자’로 각인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건 대통령과의 차별화다. 이회창 전 총리가 정치인으로 성장해 대통령 자리에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대쪽 이미지’로 김영삼 대통령과 차별화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찰떡 호흡을 과시하고 있는 이낙연 총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황교안 전 총리는 “나라가 총체적 난국”이라며 문 대통령을 공격하며 보수층을 결집시키고는 있지만 ‘나라 망친 정권의 2인자’, ‘반공 시대에 머물러있는 공안검사’라는 약점도 존재한다. 자유한국당 대표 출마를 선언하고 벼락 같이 대선주자 선호도 1위를 차지했지만 그의 정치적 미래가 밝지 않은 이유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황교안 전 총리는 아직 안 써본 카드라는 게 강점”이라며 “그게 2·27 전당대회까지는 먹힐 것이지만 그 이후가 중요하다. 정치적 경력을 쌓아야 하고 만약 당대표가 된다면 그뒤 총선에서 어떤 성적을 낼 것인지가 그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짚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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