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특파원리포트] 나고야 신궁 집단 참배한 '한국 소녀 300명'..그리고 일본의 양심

이승철 입력 2019.02.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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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은 머리에 흰 머리띠를 하고 있다. 날이 더운 듯 약간은 짧은 소매 옷, 그리고 나란히 신사를 줄지어 빠져나오는 소녀들 옆으로는 군복 차림의 무서운 얼굴을 한 아저씨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발을 맞춰 걷는다.

앞선 소녀가 든 깃발. '여자항공정신대'

1944년 나고야의 '아츠타 신궁' 앞에서 찍힌 사진. 조선에서 건너온 300명의 소녀들이 신궁을 참배하고 나오는 모습이 찍힌 흑백 사진 한 장. 이 사진은 그 후 '근로정신대'라는 일제 강점기 또 하나의 아픈 역사를 증명해주는 역사의 기록이 됐다.

1986년 ‘미쓰비시 순직자 명부’

나고야의 한 고등학교 세계사 선생님이었던 다카하시 씨는 일본 식민지 시절 징용 문제를 개인적으로 연구하던 중, 인근 미쓰비시 공장에 관련 자료가 있는지 문의하게 된다.

그렇게 손에 넣게 된 것이 미쓰비시가 자체적으로 작성한 '순직자 명부'였다. 1944년 나고야 일대를 덮친 대지진 당시 숨진 400여 명의 희생자를 정리한 명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던 중 다카하시 씨는 한 곳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름 000. 주소 전라남도 목포...

창씨 개명을 해 언뜻 한국 이름인줄 몰랐지만, 주소가 한반도로 돼 있는 여러 명의 이름이 나왔다. 그동안 미쓰비시가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미쓰비시 근로정신대'의 실체가 처음으로 문서를 통해 드러난 순간이었다.

1988년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한국을 찾다.

재일 교포의 도움을 받아 확인한 6명의 한국인 이름. 다카하시 씨 등은 타국으로 끌려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위해 추모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먼저 유가족의 허락을 받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 끝에 한국을 찾아 관계 기관의 도움을 받아가며 유가족을 찾아 나선다.

어렵게 찾아간 유가족의 첫 반응은 냉담했다.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 없는 일본에서 갑자기 찾아온 사람들이 과거 일을 꺼내니 덜컥 의심부터 났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여기까지 왜 왔는지, 숨진 분들을 위해 추모비를 세우겠다는 취지를 이해하도록 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어렵게 마음을 연 유가족을 통해 그동안 주변에 말할 수 없었던 '근로정신대'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드러나게 된다. 같은 학교 친구였던 소녀들, 일본에 가면 '일하며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속아 1944년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모인 소녀 300명이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탓에 유가족을 통해 실제 생존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지난달 25일 돌아가신 김중곤 할아버지의 경우 여동생이 미쓰비시 공장에서 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후 같이 '근로정신대'에서 돌아온 동생의 친구와 결혼한 경우였다.

“사진이 60장 있는데요...”


나고야의 옛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에서 숨진 이들을 위한 추모비의 이야기. 특히 그 가운데 너무도 어린 조선에서 온 소녀들도 있었다는 이야기에 일본 언론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뒤 신문에서 봤다며 걸려온 전화 한 통.

"저희 아버지가 그 학생들 사감 선생님을 했어요. 당시 사진이 있습니다."

두근거림을 안고 찾아간 집. 거기엔 흑백이지만 너무도 또렷하게 소녀들이 찍힌 사진 60장이 남아 있었다.

헌병 출신이었던 사감은 늘 군복 차림으로 소녀들 옆에 서 있었고, 소녀들은 미쓰비시 마크가 선명한 모자를 쓴 채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진 속 소녀들은 때로는 순박하고, 그리고 너무 앳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일본 3대 신궁 중 하나라는 아츠타 신궁은 소녀들이 일본에 도착한 직후 들른 곳으로 추정된다.

"할머니들이 당시 어떤 맹세를 했는지 기억을 하시더라고요. '일본은 신들의 나라, 아름다운 나라, 천황의 나라...저희들은 일본 제국의 승리를 위해 힘쓰겠습니다.'라고 맹세를 하게 했다고요.(다카하시 씨)"

2007년부터 지금까지 지금도 계속되는 '금요행동'

'근로 정신대'. 17개월간 일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나왔지만, 전쟁이 끝나자 미쓰비시는 어린 소녀들에게 돈 한 푼 주지 않고 쫓아내듯 그대로 돌려보냈다.

마치 죄를 지은 듯, 40여 년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 설움이 일본의 시민들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고, 할머니들은 1988년 추모비 제막식 날 비석에 새겨진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그동안 가슴에만 묻어뒀던 울음을 쏟아냈다.


그리고 10여 년.

1999년 오랜 기다림과 준비 끝에 일본에서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소송이 시작됐다. 일본의 변호사 40여 명이 변호를 자처하고 나섰고, 9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해 '소송지원회'를 만들어 뒷바라지를 자청했다. 원고 할머니들이 재판을 위해 일본에 오는 비용을 포함해 모든 것들이 일본 내 양심의 목소리를 가진 이들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노동의 강제성, 불법성'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배상의무는 없다며 할머니들을 외면했다. 일본 법원이 정의를 외면한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길.

'양심의 목소리'들이 선택한 것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문제 해결 촉구였다.

그렇게 2007년 시작한 '금요행동'. 미씨비시가 잠시 협상에 응한 2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10년 넘도록 매주 금요일 아침이면 도쿄의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앞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마이크를 든다.


나고야에서 도쿄까지 매주 옮기는 발걸음. 10년을 넘게 계속한 양심의 목소리다. 자비를 들여가며 매주 신칸센에 오르는 길이 쉬웠을 리가 없다.

"할머니들이 일본에 왔을 때 나이가 제 딸이랑 같더군요.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의 나이와 비슷하고요. 제가 부모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가해국 시민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할머니들의 얼굴을 보고 그 마음을 마주하면 가슴이 저며오는 것 같아요.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을 가지면 반드시 해결될 거라 믿습니다."

40대에 비석을 세우러 한국을 처음 찾았던 다카하시 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는 이제 70대의 할아버지가 됐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면서 또 희망을 갖게 됐다. 1988년 시작한 발걸음 속에 몇 차례 되지 않는 승리다. 더욱 힘을 낸다.

꿈적도 않는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이제 '금요행동'은 미쓰비시 앞으로 가기 전에 시간을 더욱 당겨 출근길 일본 외무성 앞에서도 열린다.

"할머니들이 살아계실때..."

1988년 추모비 건립, 1999년 일본 내 소송 시작, 2007년 금요행동 돌입, 2018년 한국 대법원 승소 판결. 앞으로 10년 뒤 '근로정신대'의 역사는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이제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 할머니들도 열 분이 남아 계실 뿐이다.

이승철 기자 (neost@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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