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공인 뺨친 '온누리 상품권깡'..1700억 혈세, 업자 주머니만 불려

최효정 기자 2019. 2. 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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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에 9000원에 구입하셨죠? 9400원 줄테니 파세요. 1만원권 1장에 400원 남는 장사에요. 더 가져오세요. 매입해 드릴테니…"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서울 남대문의 한 상품권 거래소. 아침부터 상품권을 팔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설 연휴를 앞두고 전통시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온누리 상품권’이 큰 인기였다.

"온누리 상품권은 할인율이 워낙 커서, 팔아서 시세차익을 남기려는 사람이 많아요. 쉽게 말해 ‘상품권깡’이죠. 설 연휴가 다가오면서 하루에 적게는 500여장, 많게는 2000~3000장까지 매입하고 있습니다." 상품권 거래소 직원의 얘기다.

지난달 30일 한 은행 남대문지점 입구에 온누리 상품권 품절을 알리는 알림판이 붙어 있다. /최효정 기자

정부는 올해 설 대목을 맞아 기존 5%였던 온누리상품권의 구매 할인율이 지난달 21일부터 31일까지 한시적으로 10%로 늘렸다. 1인당 구매할 수 있는 금액도 월 30만원에서 50만원까지 확대됐다. 50만원권을 현금 45만원에 살 수 있는 것이다. 할인율이 높다보니 상품권을 되팔아 현금화하는 ‘상품권깡’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온누리 상품권, 1장도 못 사…대행업체까지 등장

지난 30일 조선일보 디지털 편집국이 서울 시내 곳곳 온누리 상품권 판매처 12곳을 훑었지만, 모두 매진된 상태였다. 그야말로 ‘대란’이었다. 신한·우리·기업·농협·새마을금고 등 은행을 찾아 온누리 상품권 구입을 문의해도 "없습니다"라는 짧은 대답만 돌아왔다. 답답했는지 한 은행 청원경찰은 "늦어도 너무 늦게 왔다. 판매를 시작한 지난달 21일 오전에 이미 할당량 전부 소진된 상태"라며 "다른 지점에 배정된 추가물량도 모두 2~3일 안에 다 팔려 지금은 어딜가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일부 은행들은 온누리 상품권을 구입 문의가 많아, 입구에 ‘상품권 재고없음’ ‘온누리 상품권 품절’ 등의 안내문을 붙여 놓기도 했다.

전통시장 수요 증가를 위한 상품권인 온누리 상품권. /연합뉴스

온누리 상품권은 전통시장 수요 증가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발행하는 상품권이다. 전국 1400여개의 전통시장과 18만여 개의 가맹점에서 사용할 수 있다. 전자상품권의 경우 전용 온라인쇼핑몰 등 온라인에서도 쓸 수 있다.

상품권 거래소의 주요 거래 고객은 기업과 시장 상인이다. 온누리 상품권을 대량 구입하려는 기업들에게 300~400원의 마진을 남기고 9700~9800원에 넘긴다. 또 시장 상인들도 온누리 상품권을 많이 구입한다. 상인들이 9700~9800원에 구입한 상품권을 은행에서 1만원으로 현금화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 혈세로 상품권깡 업자들의 엉뚱한 주머니를 불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중기부의 설 할인 기간 온누리 상품권 판매 목표치는 4500억원. 할인되는 10% 금액은 전부 국고에서 보전된다. 올해 설에만 450억원 가량의 예산이 든다는 뜻이다. 지난해 설에는 약 4000억원어치를 판매해 예산만 400억원이 소요됐다. 명절 기간을 포함해 한 해 온누리 상품권용으로 배정되는 예산을 모두 더하면 1700억원에 달한다.

상품권 매입소 대표 신모(32)씨는 "온누리 상품권깡이 돈이 된다는 얘기에 노숙자·독거노인 등을 동원해 수고비 1만~2만원을 주고 시켜서 대량으로 사들이는 대행업자까지 나오고 있다"며 "상품권을 쓰다가 남아 판매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깡을 위해 구입한 사람이 사용하지 않고 곧바로 팔아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관계자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단속된 7건에 대해서는 통계가 있지만, 그 외 나머지는 부정유통 됐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사실상 통계가 없다"며 "유통되는 방법이 워낙 다양해 통계를 만들기 어렵고 상품권 일련번호를 추적하는 등 단속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상인들 "시장 활성화 체감 못해"…중기부 부정유통 단속

그 많은 상품권은 어디로 갔을까? 정부가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온누리 상품권을 지원하고 있지만, 정작 시장 상인들은 체감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광장시장에 제수용 과일이 쌓여있다. /뉴시스

서울 경동시장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하는 박모(71)씨는 "경기 침체 속에서도 상품권이 불티나게 팔렸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실제 고객 수는 별 차이가 없다"며 "물량이 그렇게 많이 풀렸다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건지 모르겠다. 오늘 1만원짜리 한 장 들어왔다"고 했다.

온누리 상품권은 온라인에서도 거래가 활발하다. 이미 인터넷 중고카페 등에서 온누리 상품권은 1만원권을 9400~9600원에 산다는 글로 넘쳐났다. 대신 구입해주겠다는 글까지 올라온다.

중기부는 온누리상품권 부정유통을 근절하기 위해 지방청·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6개 지역본부, 60개 센터 상품권 담당자 100여명으로 구성된 현장대응반을 운영한다. 부정유통이 적발되면 가맹취소와 함께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방침이다.

또 중기부는 불법행위의 경중과 부정유통 규모를 따져 형사고발과 국고손실(할인보전금)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이다. 하지만 중고거래 사이트를 통해 이뤄지는 개인 간 거래에 대해서는 규제나 처벌 규정이 전무해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전통시장 지원이라는 의도는 좋지만 효과가 미미하다면 재정이 많이 드는 사업은 과감히 축소하고 예산을 통제해 국고 낭비를 막아야 한다"면서 "직접 지원과 같이 더 효과적인 방안을 검토하면서 동시에 현 상황을 악용하는 일을 막기 위해 정부의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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