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부담 나눠야".."여자 혼자 밤근무 범죄위험"
정부세종청사에 있는 한 행정부의 이모 주무관(39)은 7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남자가 숙직을 떠맡아야 하는 고충을 토로했다. 국회 출장 등 외부 일정이 많은 이 주무관은 숙직을 한 뒤에도 바로 퇴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주간 업무를 마치고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숙직을 한 뒤에도 계속 업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무관은 “숙직 한 번 서고 나면 너무 피곤하다. 여직원도 숙직 부담을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주무관의 사례처럼 남자만 숙직을 하는 공공기관이 대부분이다. 정부 부처 52곳과 광역지방자치단체 17곳 등 69곳 중 63곳(91.3%)이 남자만 숙직을 선다. 여자가 숙직을 하면 위험할 수 있고 가사와 육아에도 방해가 된다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의 숙직 업무는 야간에 걸려오는 민원 전화 응대가 대부분이다. 긴급 상황이 아니면 현장에 나가지 않고 다음 날 담당 부서에 민원 사항을 전달하는 정도다. 예전에는 숙직 근무자가 청사 순찰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대부분 전문 보안업체가 순찰 업무를 맡는다.
경기 구리시 직원 A 씨는 “숙직 업무라는 게 민원 전화를 대기하는 정도다. 여자라고 해서 못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A 씨는 “정부가 여성 공무원 승진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맞추면서도 고된 업무는 남자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양성평등에 어긋난다”고 했다. 8년 차 주말부부인 서울시내 한 구청의 B 주무관은 “토요일 밤에 숙직하고 일요일 아침에 퇴근하면 비몽사몽 상태여서 지방에 있는 아내와 자녀들을 보러 가기 힘들다. 남자도 여성 못지않게 가족을 챙기고 싶은데 숙직은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직사회가 시대 변화에 맞춰 숙직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최병대 수원시정연구원장은 “남자가 모두 책임져야 하는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 양성평등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민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군대 문화의 잔재인 ‘5분 대기조’ 형태의 숙직은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야간 민원 전화는 비상상황조 직원들의 휴대전화로 돌아가게 하는 등 대안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 서울시, 설문 거쳐 올해부터 ‘남녀 숙직’ ▼
서울시는 남성 직원만 하던 숙직을 올해 1월부터 여성 직원도 서도록 근무규칙을 바꿨다. 서울시의 여성 공무원 비율이 40%를 넘어서면서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는 내부 목소리를 반영한 결과다.
서울시의 여직원 숙직 문제는 지난해 3월 직원들이 사용하는 자유게시판에 ‘여직원들도 숙직하자’는 의견이 올라오면서 공론화됐다. 2018년 기준 여성 직원의 비율이 40%를 넘어서며 남녀 간 당직 주기 격차가 벌어지는 근무 형태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한 달 뒤 서울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이뤄졌고 ‘여직원도 숙직해야 한다’는 데 63%가 찬성했다. 남성 응답자는 66%, 여성 응답자는 53%가 찬성했다. ‘여직원 수 증가’(25%), ‘남녀 구분 불필요’(23%), ‘잘못된 관습 중단’(15%) 등이 찬성 이유였다. 이런 결과가 나오자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당직 근무 시행규칙을 개정했고 지난해 12월 여성 공무원 숙직제도를 시범 운영한 뒤 올 1월부터 정식 시행에 들어갔다.
서울시는 근무 시행규칙 개정 당시 여성의 안전과 육아 문제 등을 걱정하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나오자 해법 마련에 나섰다. 임신 중이거나 만 5세 이하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는 남녀 구분 없이 당직 근무를 서지 않아도 되도록 조례를 개정했다. 여성 공무원증이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한 여성 숙직실도 새로 마련했다. 주취자 등 여성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민원인은 청원경찰과 방호 인력이 청사 외부를 순찰하며 응대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다른 공공기관들도 무작정 숙직 제도 변경에 나설 게 아니라 여성의 안전 문제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구체적인 매뉴얼 등을 선제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구특교 kootg@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김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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