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경] '브렉시트 엑소더스'.. 유대인·위그노 떠난 스페인·佛 닮았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2019. 2. 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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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재들 영국 탈출 러시
250여곳, 네덜란드로 본사 이전.. 독일 국적 취득 2년새 12배 급증
지난달 25일 런던의 유럽의약청(EMA) 본부에서 직원들이 로비에 게양된 EU(유럽연합) 28개 회원국 국기(國旗)를 곱게 접어 상자에 담았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EMA는 1995년 창립 이후 24년 만에 런던을 떠났다. 오는 3월 29일로 예정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앞두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업무를 이어간다. 영국의 바이오 연구재단인 웰컴트러스트의 제러미 파라 사무총장은 "영국에는 슬픈 날이고 네덜란드에는 엄청난 날"이라고 탄식했다. EMA에 근무하는 900여명의 고급 인력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사 갈 뿐 아니라, 매년 전 세계 의약 전문가 3만명이 EMA를 찾아오는 경제적 효과를 몽땅 네덜란드에 뺏기게 됐기 때문이다.

브렉시트가 유럽 패권 이동의 역사를 재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국의 EU 탈퇴로 시장과 기회를 잃을 것을 우려한 기업과 인재들의 탈출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16~18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의 종교 탄압으로 과학·기술 인재가 많았던 젊은 신교도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유럽의 패권이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넘어간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EMA 이전은 신호탄에 불과하다. 소니와 파나소닉 등 유럽 본사를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옮기겠다고 발표한 기업은 250여 곳에 달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JP모건·시티 등 글로벌 투자은행들도 런던 근무 인력을 프랑스와 독일로 재배치하고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 다이슨조차 지난달 싱가포르로 본사를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외국 국적을 취득하는 영국인들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독일 국적 취득자는 2015년 622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7439명으로 12배 늘었다. 특히 유대인이 많다. 독일 국적을 신청한 영국의 유대인은 2016년 684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1667명으로 배 이상으로 늘었다.

최근 기업과 인재의 영국 탈출은 16~18세기 스페인과 프랑스를 닮았다. 16세기 스페인 왕정이 종교재판으로 유대인을 핍박하자, 이를 피해 네덜란드로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했다. 이재(理財)에 밝은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의 국제 무역과 금융 산업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제치고 17세기 동방 무역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들이 종교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영국·독일·스위스로 옮겨갔다. 신교도였던 위그노는 젊은 지식인들이 주류였으며, 제철·염료·화학 분야의 첨단 기술 보유자가 많았다. 위그노들은 1685년 프랑스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1598년 앙리 4세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선언)을 폐지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5년 사이에만 최소 20만명 이상이 프랑스를 빠져나갔다. 네덜란드는 프랑스어로 예배하는 교회까지 만들며 위그노를 적극 수용했다.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는 위그노 기술자들이 몰려들자 날개를 단 격이 됐다.

영국도 위그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영국왕 찰스 2세는 특별이민법을 제정해 위그노의 '기술 이민'을 받아들였다.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인 증기기관도 위그노의 기술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프랑스 물리학자였던 데니스 파핀은 17세기 후반 영국에 건너와 초기 형태의 증기 엔진과 증기 압력 요리기구를 발명한 위그노였다. 독일은 영국·프랑스에 비해 산업이 뒤떨어진 나라였지만 위그노를 받아들이며 극복의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화학, 기계공업을 일으키는 데 위그노들의 도움이 컸다. 거대 화학·제약회사 바이엘의 창업자 프리드리히 바이엘과 메르세데스 벤츠를 세운 카를 벤츠가 독일로 넘어온 위그노의 후손이다. 스위스 시계산업을 부흥시킨 주역도 위그노다. 영국의 인문학자인 사이먼 가필드는 "제네바 시계공들의 기술력이 프랑스에서 넘어온 위그노의 도움으로 급성장했다"고 했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인재 유출'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스페인은 유대인들을 탄압했다가 영국과 네덜란드 국력만 키워줬다. 16세기 후반 무적함대로 기세를 올렸던 스페인은 17세기 들어 크고 작은 전쟁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패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프랑스도 전문 인력 유출로 유럽에서 산업혁명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영국의 저술가 아푸아 허시는 가디언 기고문에서 "런던의 은행을 발전시킨 주역이 위그노들이었다"며 "브렉시트로 다른 민족과 국가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영국의 미래에 위험 요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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