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잘려나간 청년의 손가락 발가락.. '위험 외주화'의 대가

구자창 기자 2019. 2. 1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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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업체 직원 2명 감전사고.. '김용균법'으로도 사고 못 막아
고(故) 김용균씨 빈소가 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빈소에는 비정규직이던 고인이 생전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을 요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과 그림도 놓여 있다. 윤성호 기자

안전진단을 하는 하청업체 소속 청년 노동자 2명이 전철역에서 작업 도중 고압전류에 감전돼 각각 손가락과 발가락 일부를 절단한 일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 중 한 명은 사고 후유증으로 아직 걷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사고 원인 대부분이 원청업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위험의 외주화’에 경종을 울린 고(故) 김용균씨 장례가 9일에서야 치러진 가운데 또 다른 비극적 사례가 드러난 것이다.

10일 사고를 당한 유모(26)씨의 소송 대리인에 따르면 안전진단 업체 J사 소속인 유씨는 지난해 5월 10일 오전 1시쯤 서울 지하철 4호선 과천역에서 구조물 안전진단 작업을 하다 2만2900V 전류가 흐르는 전차선로에 감전됐다. 휴대하고 있던 작업도구가 선로에 닿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유씨는 선로를 따라 움직이는 3~4m 높이의 작업용 선반(고소작업대) 위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일용직 노동자 김모(36)씨도 함께 감전됐다. 김씨는 작업대를 밀며 유씨를 보조하고 있었다.

유씨와 김씨는 사고로 3도 중증 전기화상을 입었다. 유씨는 왼쪽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잘라내야 했다. 그는 사고 발생 7개월 후인 지난해 12월 퇴원해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고압전류가 오른쪽 팔을 통해 오른쪽 다리로 흘렀다. 이 때문에 오른쪽 첫째 발가락 전부와 둘째 발가락 일부를 잃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지금도 제 발로 걷지 못하는 상태다. 여전히 병상에 있다. 김씨가 다시 걷기 위해서는 장기간 재활치료를 받아야 한다. 유씨와 김씨 모두 치료를 마치더라도 손과 발을 크게 다쳐 예전처럼 작업을 이어가기는 어렵다고 한다.

사고 발생 후 9개월이 지났지만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이는 없다. 원청업체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사고 경위를 허위로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노동자들은 제대로 배상을 받지 못했다. 유씨는 지난해 7월 원청업체 등을 업무상과실치상,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현재 이 사건은 수원지검 안양지청이 수사 중이다.

이 사건은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설비 점검 도중 숨진 김용균씨 사건과 유사하다.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소속이었던 김씨는 ‘2인 1조 근무 규정’ 등 기본 안전수칙을 누구도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희생됐다.

이번 사고에서도 피해자들은 J사의 원청업체인 S사 측이 기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던 점을 사고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근무자가 고소작업대에 올라가는 경우 단전조치는 필수다. 감전 위험 때문이다. 그러나 S사 소속 ‘철도운행안전관리자(안전관리자)’는 단전 없이 작업을 진행했다. 지하철 선로에서 감전 우려가 있는 작업이 진행될 때 해당 전기선로를 미리 단전하도록 사업주에게 강제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단전 작업 시엔 ‘전기안전관리자’라는 별도 관리자도 있어야 하지만 없었다고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기안전관리자 없이 작업자를 전차선로에서 일하게 했다는 건 상식에 반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씨와 유씨가 사고를 당한 날 원청업체 측은 단전 여부 확인 및 안전교육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청업체인 S사 소속 작업책임자는 단전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작업 전 필수 절차인 안전교육에는 단전 여부 등 당일 작업계획이 포함된다. 하지만 원청업체는 작업자들을 세워놓고 보고용 사진을 찍는 것으로 교육을 대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씨는 “법은 요식행위로만 존재했다”고 말했다. S사 소속 작업책임자도 단전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근본적인 배경에는 ‘위험의 외주화’가 있었다. 수도권 전철 4호선 과천역 근처의 안전진단 작업을 진단 전문업체 S사에 처음 하도급한 건 대우건설이다. 대우건설은 2017년 3월 경기도 과천 주공1단지 재건축 정비사업 시공사로 선정됐다. 이어 재건축 공사 시 인근 지역에 대한 안전진단 의무를 부과하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라 S사에 진단 작업을 하도급했다. S사는 다시 직원 10명 남짓한 영세업체인 J사에 재하도급했다. 유씨와 김씨는 이 같은 하도급 구조 말단의 J사 소속이었다. 유씨는 정규직, 김씨는 비정규직이었다.

사고 이후 S사가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J사 관계자 등에 따르면 S사 소속 안전관리자 박씨, 작업책임자 김씨는 사고 직후 안전교육 일지에 현장 작업자들의 서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사는 또 사고 이후에야 J사에 ‘이 용역과 관련해 발생하는 모든 사고의 책임은 을(乙)에게 있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사고 발생 책임을 J사가 일방적으로 지게 된다. J사는 계약서 체결을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S사 측은 한국철도공사에 ‘유씨와 김씨가 고소작업대 없이 도보로 작업했으며 유씨가 작업 중 넘어져 작업도구가 선로에 닿은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사고 경위서를 제출했다. 사고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는 식으로 작성한 것이다.

피해자들은 아무런 배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치료비와 위자료 등 별도 배상금은 원청업체와의 합의하에 지급받게 된다. S사가 합의해 주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은 민사상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수원지검 안양지청은 피해자 구제를 위해 다음 달 15일 형사조정위원회를 열기로 했다. 형사조정은 고소인과 피고소인이 합의하면 민사소송 없이도 피해자가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앞서 경기도 과천경찰서와 안양고용노동지청은 최근 S사 소속 안전관리자 박씨, 작업책임자 김씨 등 6명과 S사, J사 두 회사 법인에 업무상과실치상,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다만 배상과 사법처리로는 사고 재발을 막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김용균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법이 규정한 사내도급 금지범위는 제한적이다. 김씨의 발전소 설비 점검 작업뿐 아니라 유씨가 진행한 지하철 안전진단 작업도 사내도급 금지대상이 아니다. 하청은 계속된다는 얘기다. 노동자 작업중지권은 여전히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유씨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어도 작업을 거부하려면 회사에서 잘릴 각오를 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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