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판결, ICJ·중재 가도 한국이 이긴다"

남정호 2019. 2. 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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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91년 개인청구권 인정
한일협정으론 외교보호권만 소멸
일, 한국인 청구권 불인정 법 제정
비슷한 법 없는 한국선 적용 안 돼
일본, 현금 아닌 생산물·용역 제공
중재든 재판이든 당당히 맞서야

[남정호의 논설위원이 간다]
지난해 12월 부산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를 추모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강제노동자상을 일본 총영사관 앞으로 옮긴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일본의 강제징용 배상 주장해온 다카키 변호사
지난해 10월 말에 내려진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로 한일 관계가 최악이다. 일본 아베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이 청구권을 포기한 만큼 강제징용 배상은 있을 수 없다고 펄펄 뛴다. 일본 측은 이와 관련, 지난달 '정부 간 협의'를 요구해 왔고 30일간의 답변시한이 끝나는 날이 지난 8일이었다. 이런 움직임에 한국 정부는 무대응으로 나가고 있다.
이로 인해 외교적 협의가 무산되자 일본 정부는 다음 달 초쯤 중재위원회에 이 문제를 넘길 심산이다. 한일협정은 분쟁이 발생할 경우 먼저 협의로 해결을 모색하되 그래도 안 되면 두 나라와 제3국에서 한 명씩 임명한 3명의 '중재위원회'를 만들어 문제를 풀도록 했다. 아베 정권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법을 무시한 것으로 중재든, 국제사법재판소(ICJ)든, 국제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 일본 법률가 사이에서도 완전히 다른 의견이 나온다. "일본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목소리를 내온 대표적인 율사 다카키 켄이치(高木健一·74) 변호사를 지난달 31일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다카키 겐이치 변호사는 지난달 31일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판결을 중재나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도 절대 한국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남정호 기자
Q 일본이 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A "무엇보다 한일협정으로 사라진 것은 '외교보호권'이지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남아있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인정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Q 일본 정부가 언제, 어떻게 인정했나.
A "1991년 8월 참의원 회의에서 당시 일본 외무성의 야나이 순지(柳井俊二) 조약국장은 '한일협정은 양국이 국가로서 가진 외교보호권을 서로 포기한 것이지 개인 청구권을 국내법적으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나도 현장에 있었는데 일본사회당의 시미즈 스미코(清水澄子) 의원에게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한 것이냐'라고 물어보라고 쪽지로 촉구해 이런 답을 얻었다."
Q 일본 정부가 이렇게 답한 배경은
A "그 이전, 일본계 캐나다인이 개인청구권 관련 분쟁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했을 때 국가 간 협정으로는 개인청구권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재판부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김상선 기자
자료를 찾아보니 다카키 변호사가 언급한 일본계 캐나다인 사건은 이랬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캐나다 정부는 일본계 주민 2만2000여 명을 강제수용소에 몰아넣고 재산을 몰수했다. 적국 출신인 이들이 위협이 된다는 이유였다. 결국 일본계 캐나다인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4년이 지난 1949년에야 풀려난다.
이들은 석방된 뒤 얼마 후 빼앗긴 재산을 돌려달라고 캐나다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문에 여의치 않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일본과 45개 연합군 측 국가와 맺은 이 조약은 필리핀·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합군 국가와 일본 간에는 전쟁과 관련된 청구권을 소멸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게 골자였다. 이에 따라 캐나다 정부가 일본 국적의 주민에게 몰수한 재산에 대해서도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재산을 잃게 된 일본계 캐나다 주민은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됐다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조약으로 없어진 것은 외교보호권이지 개인 청구권은 소멸한 게 아니다"라며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라고 밝혔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없어졌다는 현재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주장한 것이다.
1945년 3월 남태평양에서 미군에게 구조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 제공=국사편찬위원회
다카키 변호사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권이 살아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다른 논리도 폈다. 일본이 한국인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별도의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Q 한일협정으로도 개인청구권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일본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었나.
A "그래서 만들어진 게 일본국 법률 144호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이 법을 제정했다. 지금 일본 정부가 주장하듯,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없어졌다면 뭐하러 이 법을 만들었겠는가. 이는 협정만으로는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법률 144호와 같은 국내법을 만들지 않은 한국에서는 개인청구권이 살아있다고 보는 게 옳다."
지난해 10월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승소 판결을 받은 뒤 손을 흔들고 있다. 김상선 기자
마지막으로 다카키 변호사는 한일협정에 따라 일본이 제공한 경제적 지원의 성격을 봐야 한다고 했다. 이를 보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지급 책임은 한국 정부에 있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Q 일본이 질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도 있나
A "아베 정부는 물론이고 일본 방송에서도 한국이 5억 달러를 받은 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를 경제건설에 썼으니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지급 의무는 한국 정부에 있다는 논리를 편다. 사실을 모르는 소리다. 당시 일본은 한일협정에 따라 3억 달러에 해당하는 생산물 및 용역으로 10년간 분할 제공했다. 나머지 2억 달러 규모의 대출 역시 마찬가지다. 현금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쓸 것인지는 양국 정부 대표로 구성된 합동위원회에서 결정됐다. 한국 정부가 마음대로 쓸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Q 일본 정부가 제공한 생산물과 용역은 어떻게 쓰였나.
A "일본 기업이 한국에 생산설비를 지어주는 형식이 많았다. 당시 부진했던 철강회사 신닛테쓰(新日本製鐵)로부터 전체 액수의 10%에 해당하는 5000만 달러어치의 설비를 사들인 뒤 이를 한국에 제공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으며 한국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계속할 수 있는 '일석삼조'였다."
지난해 11월 강제징용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해 미쓰비시중공업은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소송을 낸 김성주 할머니가 재판장을 나온 뒤 손을 흔들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국 대법원 판결이 옳다고 믿는 건 다카키 변호사뿐 아니다. 지난해 판결 이후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일본 변호사는 200여명에 달했으며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의 향후 대응과 관련해 다카키 변호사는 중재나 국제사법재판소에 사건을 가져가는 걸 주저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해 10월 일본 중의원 회의에서 강제징용에 관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국제법에 비춰볼 때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도쿄=지지통신
Q 일본 정부는 중재로 가져가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려 한다.
A "일본 정부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한일협정 규정대로 중재로 가는 게 좋다.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도 걱정할 게 없다. 그러니 한국 정부는 당당히 나가야 한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가 한일협정으로 해결됐으며 한국이 국제법도 모른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다카키 변호사는 한국의 법조기자협회가 주는 '올해의 법조인상'을 받기 위해 방한했다. 도쿄대 법대 출신인 그는 1975년 이래 44년간 일제 식민지 시대 때 피해를 본 한국인들을 위해 헌신해 왔다. 그는 한국인들과 원활하게 대화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 덕에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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