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공주는 왜 총리가 되려 했나..하루 만에 좌절된 '탁신파'의 꿈

이영희 입력 2019. 2. 11. 06:00 수정 2019. 2. 11.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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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태국 엔터테인먼트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은 우본랏 라차깐야 공주가 서울 소공동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총리 후보가 되기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진 평민이다.”(누나 우본랏 공주) “왕실 가족 구성원을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동생 와치랄롱꼰 국왕)
현 국왕의 누나가 총리직 출마를 선언했다가 동생의 반대에 부딪혀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로 태국이 혼란에 휩싸였다. 10일(현지시간) 일간 방콕포스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태국 정당 타이락사차트는 지난 8일 마하 와치랄롱꼰(66) 현 국왕의 누나 우본랏 라차깐야(67) 공주를 오는 3월 24일 열리는 총선의 총리 후보로 등록했다가 하루 만인 9일 철회했다.

누나의 총리 출마 소식을 접한 와치랄롱꼰 국왕이 8일 밤 “우본랏 공주는 여전히 짜끄리 왕조의 일원으로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며 공식적으로 반대 성명을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입헌군주제 국가지만 아직 왕실의 영향력이 큰 태국에서 왕가의 정치 참여는 헌법으로 엄격히 제한돼 있다. 하지만 왕의 바로 위 누나인 우본랏 공주는 1972년 미국인 피터 젠슨과 결혼하면서 왕족 신분을 포기한 상태다.

8일 총리 후보로 우본랏 공주를 등록한 타이락사차트당은 공주의 총리 도전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고, 우본랏 공주도 이를 수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국왕이 직접 나서 누나의 선택에 제동을 걸면서 해프닝은 이틀 만에 일단락됐다.


국민 사랑 받는 ‘셀러브리티 공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우본랏 공주의 출마 소식이 전해지자 소셜미디어(SNS) 등에는 “태국을 위한 새롭고 신선한 시작이다”, “눈물이 난다” 등의 환영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만큼 우본랏 공주에 대한 국민들의 신망이 높다는 이야기다. 공주가 실제로 출마할 경우,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선거판을 뒤흔들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도 잇따랐다.
해외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지지 세력인 푸어타이당의 '자매정당' 타이락사차트 당 관계자가 8일 방콕의 선거관리위원회를 방문,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태국 국왕의 손위 누이인 우본랏 라차깐야 공주를 3·24 총선의 총리 후보로 등록하며 관련 서류를 보여주고 있다. [EPA=연합뉴스]
우본랏 공주는 태국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 전 국왕의 네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난 순간부터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요트를 즐겼던 아버지와 함께 1967년 동남아시아 경기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을 졸업하고 미국인과 결혼하면서 왕족의 지위를 잃었지만, 1990년대 말 이혼하고 2001년 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배우로 변신해 ‘기적이 일어나는 곳(2008)’ ‘나의 최고 보디가드(2010)’ ‘함께(2012)’ 등의 영화에 출연했고, 가수로도 활동했다.

우본랏 공주는 2008년 ‘태국 엔터테인먼트 엑스포 2009’ 행사의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가수 비를 좋아하고, ‘대장금’ ‘풀하우스’ 등의 드라마도 재밌게 봤다”며 한국 문화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직접적인 정치 활동은 아니지만 빈곤 아동, 환경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8일 타이락사차트당 발표에 따르면 공주는 십대들을 대상으로 마약 복용 금지 캠페인을 벌이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고, “태국인들을 빈곤에서 탈출시키고 그들에게 좋은 미래를 주고 싶어” 총리직 출마를 결심했다고 한다.


탁신계, 비장의 카드
이런 개인적 인기 외에도 공주의 갑작스런 총리 도전에는 두 달여 남은 총선을 둘러싼 태국 정치권의 치열한 수 싸움이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는 2014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짠 오차 현직 총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과 해외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추종 세력이 경합 중이다.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 [AP=연합뉴스]
탁신 전 총리파인 대형 정당 푸어타이당과 ‘자매당’인 타이락사차트당은 이번 선거에서 정권 탈환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쉽지 않은 상황이다. 차기 총리 선호도 조사에서 현 쁘라윳 총리가 지속적으로 1위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빼어 든 카드가 공주였다. 태국에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왕실의 ‘후광’을 가진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국면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우본랏 공주는 탁신 전 총리 가족과도 각별한 사이로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 경기장에 탁신 총리와 그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 전 총리와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헌법 위반한 정당 해산하라”
공주의 총리직 출마 사퇴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 보이지만, 파장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친(親) 군부정권 정당인 국민개혁당은 10일 우본랏 공주를 총리 후보로 지명했던 타이락사차트당의 해산을 요구하고 나섰다.

파이분 리띠따완 국민개혁당 대표는 “우본랏 공주가 왕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국왕의 성명으로 명백해졌다”고 밝히고 “정당이 입헌군주제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헌법재판소에 해산을 요청해야 한다”면서 선관위에 공식 조사를 요청했다.
탁신 전 태국 총리. [중앙포토]
‘왕실 모독’을 엄격하게 단속하는 태국에서 국왕이 공주의 출마 불가를 선언한 만큼,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나오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공주를 총리 후보로 추대했던 탁신 전 총리 지지 세력은 정치적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한편으론 우본랏 공주의 이번 도전이 현 태국 왕실의 불안한 상황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나온다. 태국 왕실은 집권 중인 군부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누나인 공주가 군부 반대파인 탁신계와 손을 잡은 것은 왕실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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