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공주는 왜 총리가 되려 했나..하루 만에 좌절된 '탁신파'의 꿈
현 국왕의 누나가 총리직 출마를 선언했다가 동생의 반대에 부딪혀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로 태국이 혼란에 휩싸였다. 10일(현지시간) 일간 방콕포스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태국 정당 타이락사차트는 지난 8일 마하 와치랄롱꼰(66) 현 국왕의 누나 우본랏 라차깐야(67) 공주를 오는 3월 24일 열리는 총선의 총리 후보로 등록했다가 하루 만인 9일 철회했다.
누나의 총리 출마 소식을 접한 와치랄롱꼰 국왕이 8일 밤 “우본랏 공주는 여전히 짜끄리 왕조의 일원으로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며 공식적으로 반대 성명을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입헌군주제 국가지만 아직 왕실의 영향력이 큰 태국에서 왕가의 정치 참여는 헌법으로 엄격히 제한돼 있다. 하지만 왕의 바로 위 누나인 우본랏 공주는 1972년 미국인 피터 젠슨과 결혼하면서 왕족 신분을 포기한 상태다.
8일 총리 후보로 우본랏 공주를 등록한 타이락사차트당은 공주의 총리 도전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고, 우본랏 공주도 이를 수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국왕이 직접 나서 누나의 선택에 제동을 걸면서 해프닝은 이틀 만에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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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사랑 받는 ‘셀러브리티 공주’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을 졸업하고 미국인과 결혼하면서 왕족의 지위를 잃었지만, 1990년대 말 이혼하고 2001년 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배우로 변신해 ‘기적이 일어나는 곳(2008)’ ‘나의 최고 보디가드(2010)’ ‘함께(2012)’ 등의 영화에 출연했고, 가수로도 활동했다.
우본랏 공주는 2008년 ‘태국 엔터테인먼트 엑스포 2009’ 행사의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가수 비를 좋아하고, ‘대장금’ ‘풀하우스’ 등의 드라마도 재밌게 봤다”며 한국 문화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직접적인 정치 활동은 아니지만 빈곤 아동, 환경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8일 타이락사차트당 발표에 따르면 공주는 십대들을 대상으로 마약 복용 금지 캠페인을 벌이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고, “태국인들을 빈곤에서 탈출시키고 그들에게 좋은 미래를 주고 싶어” 총리직 출마를 결심했다고 한다.
탁신계, 비장의 카드
이런 개인적 인기 외에도 공주의 갑작스런 총리 도전에는 두 달여 남은 총선을 둘러싼 태국 정치권의 치열한 수 싸움이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는 2014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짠 오차 현직 총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과 해외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추종 세력이 경합 중이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빼어 든 카드가 공주였다. 태국에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왕실의 ‘후광’을 가진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국면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우본랏 공주는 탁신 전 총리 가족과도 각별한 사이로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 경기장에 탁신 총리와 그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 전 총리와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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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위반한 정당 해산하라”
공주의 총리직 출마 사퇴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 보이지만, 파장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친(親) 군부정권 정당인 국민개혁당은 10일 우본랏 공주를 총리 후보로 지명했던 타이락사차트당의 해산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으론 우본랏 공주의 이번 도전이 현 태국 왕실의 불안한 상황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나온다. 태국 왕실은 집권 중인 군부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누나인 공주가 군부 반대파인 탁신계와 손을 잡은 것은 왕실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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