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박래군 칼럼]

박래군 |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2019. 2. 11.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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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동지가 지난 지 한참이지만 겨울의 낮은 짧았다. 마석 모란공원에 장례행렬이 도착할 때만 해도 서녘 산기슭에 걸렸던 해는 금세 넘어갔고, 곧바로 어둠이 공원묘지 전체를 덮어버렸다. 발전차에서 끌어온 전등빛에 의지해서 하관식이 진행되는 내내 김미숙씨는 울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훅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동생의 부축에 의지해서 하관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따금씩 눈물만 흘렸다. 깊은 그 눈빛, 아마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비현실적인 것만 같은 눈빛으로 그는 하관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를 두고 인터넷에서는 아들을 묻으면서도 울지 않는 비정한 엄마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외동아들을 잃은 그 엄마는 “청년의 목은 어디에 뒹굴고 있었는지/ 찢겨진 몸통은 어디에 버려져 있었는지/ 피는 몇 됫박이 흘러 탄가루에 섞였는지”(영결식에서 송경동 시인이 낭송한 조시 중에서)를 보았던 엄마다. 시커먼 석탄 가루를 뒤집어쓴 아들의 머리는 몸과 따로 뒹굴었고, 시신이 수습되기도 전에 컨베이어벨트는 재가동되었다. 피를 머금은 석탄이 컨베이어를 타고 들어가 전기를 만들었을까. 사고가 나고 며칠 뒤 김용균 노동자가 일하던 현장을 찾고 나서 김미숙씨는 말했다. “아이의 동료들에게 빨리 나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일하다가 죽는 거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1970년대 탄광 같은 곳에서 어떤 부모가 자식이 일하는 걸 보겠냐고도 했다. 그래도 공기업에 취직했으니 힘들어도 견디어 보라고 했던 그 엄마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어둠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민주노총이나, 시민단체들을 “그저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그 엄마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병든 남편과 외동아들을 2교대 노동을 하면서 책임지는 일에만 몰두해 있던 평범한 엄마였다.

아들을 잃은 뒤 그 엄마는 태안과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아들이 남긴 숙제”를 풀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지난 연말에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을 위해서 국회에 상주하면서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죽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런 덕에 28년 만에 산안법이 개정되었다. 추모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김미숙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정작 아들 김용균이 일했던 발전소는 외주화 금지 사업장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 산안법은 최초로 산재사고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명기한 법이 되었다.

산안법이 개정됐지만, 막상 해를 넘기고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과 같은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설 명절 전에 장례를 치르기 위한 결단으로 빈소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기고, 시민단체 대표들이 단식에 들어갔다. 설 연휴 동안 정부, 여당이 움직이면서 협상이 진행됐고, 마침내 2월5일 정부와 야당이 유가족 측과 시민단체들이 요구하는 내용을 수용하는 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2월9일 김용균씨가 사망한 지 62일 만에 태안과 서울을 오가면서 장례를 치렀다.

김용균씨가 묻힌 곳은 마석 모란공원 특구다. 그곳은 전태일 열사 죽음 이후 민주화운동의 성지처럼 되어 있는 곳이다. 노동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수많은 이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 김용균이 62일 만에 안식에 들어간 그 자리 앞쪽으로는 전태일이 있고, 이소선 어머니의 자리가 있다. 거기서 곧바로 올라가 공원묘지 끝에 이르면 박종철과 그의 아버지 박정기씨의 묘가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41살 때 전태일을 잃었다. 그리고 41년을 더 살면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아들의 유언을 지켜냈다. 그런 어머니는 노동자의 어머니에서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 1987년 막내아들을 잃은 박정기씨는 고문으로 죽은 아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빈소를 찾았던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씨도 1987년 아들을 잃은 뒤 민주투사로 나서서 자식의 죽음을 승화시켜오고 있다.

그런 뒤에도 삼성 반도체에서 딸 황유미를 잃은 아버지 황상기씨, 제주도 생수공장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산업체 현장학습 고교생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도 자식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도 박근혜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유가족들이 김미숙씨의 지표가 되었다.

그런 김미숙씨를 두고 유가족이 너무 나댄다는 비난이 일었다. 대통령 면담을 거절할 때가 가장 크게 비난받았다. 민주노총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모욕적인 언사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민주노총, 시민단체들과 같이 움직이는 김미숙씨에 대해 좋게 보지 않는 시선들은 따갑기만 하다.

우리 사회에는 유가족에 대한 고정된 상이 있다. 자식을 잃은 유가족은 울다가 기절해야 한다. 보상이나 받고 조용히 물러서서 정부에 대해 정치권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해야 한다. 어디 대통령이나 정부에 대해 그리고 국회에 대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유가족은 찍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가족들은 고분고분하지만 않다. 자신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자식의 죽음은 헛되게 지워지고, 묻힐 것이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청심환을 먹으면서도 자신이 가야 할 곳을 가게 된다.

몸집 작은 김미숙씨는 보기보다 단단하다. 그런 그이지만 청심환을 복용해야만 버틸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들의 부재를 매일 확인하면서 살아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가르쳐준 대로 용균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 볼까? 용균이가 살던 방은 그대로 둔 채로 아침이면 인사하고, 저녁에 들어가면 인사할까? 이제 김미숙씨는 혼자 그런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아들 또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끌어안은 김미숙, 그의 길은 험할 것이다. 험한 세상을 헤쳐 가는 김미숙씨에게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은 빚을 지게 될 것이다. 그게 불순한 유가족의 운명이지 않을까.

박래군 |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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