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K] 靑 영빈관이 '세계 최악'?..설계자에게 물어보니

황현택 입력 2019. 2. 12.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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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러 나라의 국빈 행사장과 의전 행사 장소를 둘러봤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나라의 청와대 영빈관이 최악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청와대를 떠난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 지난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보며 청와대 영빈관을 떠올렸다"면서 글을 이어갔습니다.

"청와대에 있을 때 가장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영빈관이었습니다. 말이 영빈관이지 실은 구민회관보다 못한 시설입니다. 어떤 상징도 역사도 스토리텔링도 없는 공간에서 국빈 만찬과 환영 공연 등 국가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늘 착잡했습니다."

탁 전 행정관은 그러면서 "국격은 국가의 격이 아니라 국민의 격"이라며 "청와대 직원은 야근하며 삼각김밥만 먹어도 좋으니 웬만하면 멋지고 의미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끝을 맺었습니다. 글 말미엔 파리 오페라극장 사진 2장도 붙였습니다.

출처=탁현민 전 청와대 행정관 페이스북


영빈관(迎賓館),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건물'입니다. 청와대 영빈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인 1978년 준공됐습니다. 1층은 외국 국빈의 접견 행사, 2층은 대규모 행사나 회의가 열립니다. 수용 인원은 250명 정도입니다. 올 들어서도 '중소·벤처기업인 대화'(1월 6일), '신년 기자회견'(10일), '2019 기업인과의 대화'(15일), '전국 기초단체장 오찬'(2월 8일) 등 각계각층의 발길이 끊길 새가 없습니다.

사실 그동안 영빈관을 두고 '반쪽 시설' 지적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숙소가 따로 없는 터라 외국 정상들은 이곳에서 환영 만찬 등을 한 뒤 시내 호텔로 이동해 숙박해야 합니다. 때문인지 영빈관에는 정작 '영빈관'이라고 쓰인 현판이 없습니다. 겉모습은 경복궁 내 경회루를 닮았는데, 정작 건물 내부는 프랑스 루이 14세 때의 건축 양식을 따라 부조화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출처=청와대 홈페이지


그렇다면 영빈관을 만든 사람은 탁 전 행정관의 '세계 최악' 지적에 어떤 입장일까요? 영빈관 전관 실내 설계를 한 유희준(85) 한양대 건축공학과 명예교수는 "탁 전 행정관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영빈관을 재설계하라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과 똑같이 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유 교수는 1978년, 대통령에게 영빈관 인테리어 디자인을 보고하기 위해 자와 펜, 수채 물감으로 투시도를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 대신 손으로 일일이 그려야 했다고 합니다. 청와대 설명을 들어보면 영빈관은 유 교수의 자필 투시도와 거의 똑같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다만 봉황 위에 리본 모양 휘장까지 더해지면 너무 화려해 보인다고 해 실제 영빈관에는 투시도에 있는 리본 모양 휘장이 없습니다. 유 교수와의 인터뷰는 전화로 이뤄졌습니다.


Q 탁 전 행정관 글에 대한 의견은?
A 정확히 뭘 말한 건지 모르겠다. 한국적 느낌이 없다고 지적한 거라면 어쩔 수 없다. 설계 당시에 우리 고유의 전통미를 곳곳에 표현하려고 극진히 노력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90%에 한국 고전미를 가미했다. 그런데 그분(탁 전 행정관) 눈에는 나머지 10%가 보이는 거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불쾌하지 않다. 다만 참새가 어떻게 봉황을 뜻을 알겠나. 자타가 공인하는 걸작인데 한 사람이 뭐라 한다고 흠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Q 영빈관을 지을 때 참고한 건물이 있나?
A 청와대가 설계를 의뢰한 뒤 나를 외국에 파견했다. 내 나이 45살이었다. 태국 왕궁, 영국, 프랑스 등 전부 둘러보고 왔다. 외국 건물의 장중함을 보여주면서도 은연중에 한국적 세밀함을 느낄 수 있도록 디테일 살렸다.(*편집자 주-영빈관 벽면에는 황금빛 무궁화와 태극 모양의 꽃잎, 단청 등이 양각돼 있다) 국민적 긍지와 외국 VIP가 왔을 때 '와, 한국이 멋있구나!' 읊조리도록 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작업을 했다.

Q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요구는?
A 그런 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7번 만났다. 예컨대 영빈관 2층 연회장, 네 벽면에 그림 들어갈 곳이 있는데 박 대통령이 모 비서관에게 '유 교수가 지정하는 걸 넣으라'고 했다. 백두산 등 한반도 명산이나 이순신과 같은 위인을 하려다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의 전통을 반영해 춘하추동, 사계절 풍경화를 전시했다. 박 대통령이 무척 좋아하시던 기억이 있다.

Q 숙소 설계 요구는 없었나?
A 없었다. 만약 숙소를 설계했다면 영빈관처럼 내 스타일이 아닌, 거의 한국식으로 했을 거 같다. 한국 전통 문살인 '세살문'이나 '부연'(浮椽·처마 끝에 덧얹어진 짤막한 서까래), 전통 창호 등 이런 걸로 해서 완전 한식으로 설계했을 것 같다.

Q 지금 다시 영빈관 설계 의뢰를 받는다면?
A 나는 그대로 할 거다. 작년에 40년 만에 처음으로 영빈관을 다시 방문했다.(*편집자 주-지난해 5월, '청와대 소장품 특별전' 초청 행사) '아, 그때 내가 어지간히 머리가 잘 돌아가서 이렇게 설계했구나!'라며 스스로 감탄을 했다. 내 작품에 뜨거운 '컨피던스'(자신감)가 있다.

중국 베이징 ‘조어대’ 야경


영빈관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시설입니다. 경호, 접근성, 안락함은 기본이고, 최고의 예우에 걸맞는 시설, 여기에 역사와 이야기까지 더해져야 합니다. 중국 베이징의 댜오위타이(釣魚臺·조어대), 일본 도쿄의 아카사카 이궁(迎賓館赤坂離宮),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건너편 '블레어 하우스'(Blair House) 등이 대표적 영빈관으로 꼽히는 이유는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한 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총리급 이상 국빈은 60~7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들 대부분 호텔에 머뭅니다. 호텔 측은 경호 등의 문제로 과거만큼 국빈을 반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청와대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일도 늘어나죠. 곧 방한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어느 호텔에 묵게 될까요.

호불호나 정파성을 떠나 탁 전 행정관이 경험을 통해 내놓은 나온 아쉬움은 그 자체로 경청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세계 최악', '구민회관보다 못한' 등의 지적은 아쉽습니다. 그는 "연출가로서 드리는 말씀"이라 전제했지만, 어색하고 과한 PPL(간접광고)처럼, 이런 표현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보입니다.

황현택 기자 (news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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