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난방 파업'이 보여준 우리 사회의 민낯

김소영 입력 2019. 2. 12. 13:10 수정 2019. 2. 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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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난방 켜달라' 요구했던 총학생회, '문제 의식 없다' 비판에 입장 번복
■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은 노조 비판 기고글… 학내 커뮤니티도 '시끌'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입구에 붙은 난방 재개 안내문


임금 현실화 등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온 서울대학교 시설관리직 노동자들이 어제(11일) 대학 본부와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 '난방 파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노동자들과 총학생회, 사용자인 학교측까지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상황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지난 7일 낮, 서울대 기계·전기분야 노동자들 120여 명은 행정관 등 학내 3개 건물의 기계실 문을 걸어 잠갔다. 임금 현실화 등 실질적인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난방을 껐는데, 난방이 끊긴 건물 중에 하루 평균 이용객이 9200명에 달하는 중앙도서관이 포함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8일 새벽 '페이스북'에 노조의 파업에 대한 경위 파악과 함께 총학의 입장이 담긴 글을 올렸다.

총학은 이 글에서 "노조의 정당한 파업권을 존중한다"면서도 "노조 측에 도서관을 파업 대상에서 제외해줄 것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페이스북에 게시한 공지글.


반응은 뜨거웠다. '총학이 할 일을 한다'는 응원도 있었고, '학생 편의만 찾을 거면 총학이 아니라 이익집단을 하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순식간에 댓글이 1000개 가까이 쌓였다.

댓글 중 가장 많은 추천수를 받은 것은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 학장이 쓴 글이었다. 하 교수는 "다른 나라에서는 청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사람들이 쓰레기를 모아서 시장 집 앞에 버리는 운동을 한다"면서 "서울대 총학생회의 입장은 파업하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우리 집 쓰레기만 치워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또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 따질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파업하게 만든 자본가들에게 따지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고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는 방식"이라면서 "이를 어릴때부터 배울 기회가 있었던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의 차이를 서울대 총학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도서관 난방은 끊지 말라'던 학생회, 입장 바꾸다

학생들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던 학생회는 고뇌(?)에 빠졌다. 결국 내부 회의와 노조 간담회 등을 거쳐 11일 오전 노조와 연대하겠다는 성명문을 발표했다.

학생회는 "이 사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노조와 대학 본부 간 협상의 타결이며 이를 위해 대학 본부의 적극적인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며 서울대 시설관리직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하겠다며 도서관에서 핫팩 배부를 계속 진행하고, 파업 장기화에 대비해 방한용품과 전열기를 설치하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11일 낮 서울대 도서관 입구에 총학생회가 제공한 핫팩이 놓여있다.


"도서관 볼모 파업은 '헬조선의 끝판왕'" 노조 비판 기고글 쓴 도서관장

이 와중에 서이종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사회학과 교수)은 11일자 조선일보 기고 <도서관 난방 중단… 응급실 폐쇄와 무엇이 다른가>를 통해 노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도서관과 연구실의 난방마저 볼모로 임금 투쟁하는 이번 서울대 파업은 우리 사회의 금기마저 짓밟는 초유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면서 "파업이 역풍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날로 악화하는 청년 실업 속에서 서울대 학생조차도 취업 준비로 밤낮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냉혹한 현실이라는 사실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이들이 공부하는 도서관과 연구실마저 내 몫 챙기기의 볼모로 전락하는 잔인한 현실이라면 그야말로 젊은이들이 되뇌는 진짜 헬조선의 끝판왕이 아닐까?"라고 덧붙였다.

여론은 들끓었다. 어느새 '학습권' vs '노동권'의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도서관 인근 게시판에서 파업 관련 대자보를 보는 재학생.


난방 재개되자 책 들고 몰려든 학생들… 갈등 불씨 계속

어제 낮, 난방이 막 재개된 시점에 서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노조의 파업 방식에 대해 불편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고, 불편하기는 해도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도 있었다.

서울대 재학생인 24살 강 모 씨는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추위를 많이 타서 따뜻한 환경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도서관 이용에 차질이 생겨 불편했다"면서 "잘못은 대학 본부가 하고 불편은 학생들이 겪는다는 점에서 학교에도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서 빨리 해결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고 덧붙였다.

강 씨는 학내 커뮤니티에는 주로 어떤 글이 올라오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부정적인 반응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면서 "원래 학교 커뮤니티가 노동 문제에 보수적인 편인 것 같다"고 답했다.

강 씨가 보여준 서울대 학생 커뮤니티 ‘스누라이프’ 게시글들. 노조의 파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낸 글들이 많은 추천을 받고 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재학생 25살 김 모 씨는 "도서관 춥다고 소문이 나서 5일 동안 도서관에 오지 못하다가 난방이 다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면서 "이런 방식의 파업은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견을 전했다.

김 씨와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25살 재학생 박 모 씨는 "3월이 시험이라 가장 바쁘게 공부할 시간인데, 책이 학교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도서관이 제일 공부하기 편해 자주 이용하고 있다"면서 "난방 꺼졌을 때는 체감상 이용하는 학생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됐다"고 말했다.

파업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묻자 "난방이 꺼져서 불편하기는 했지만 왜 파업을 하는지 알기 때문에 감수할 수 있었다"고 했다.

노조와 대학이 합의함에 따라 사상 초유의 서울대 도서관 '난방 파업'은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다.

하지만 학교 안팎에서는 학교와 총학 측의 대응에 대한 불만, 노조의 파업에 대한 불만 등이 뒤섞이면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취업난의 심각함을 모르는 꼰대들의 지적질',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의 전형'이라며 서로를 헐뜯는 말들이 난무한다.

닷새간의 서울대 '난방 파업'이 벗겨낸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김소영 기자 (so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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