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외신엔] ② "독립선언 든 소녀의 손목을 잘랐다" 삼일절 목격담

석혜원 2019. 2. 1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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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상 가장 완벽하고 혁명적인 저항 시위”
미국 일간지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의 편집자 맥클래치(McClatchey)는 자신이 본 3·1 만세 운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100년 전, 이방인의 눈에 비친 만세운동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극찬을 받던 만세시위의 결과는 참혹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맞섰던 시민들은 무참히 짓밟혔고, 비폭력 평화 시위는 붉게 얼룩졌다.

일제의 만행은 당시 언론의 기록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1919년, 미국의 신문이 보도한 한국과 일본 관련 기사 중 고문(torture), 학살(massacre), 살해(kill) 등의 단어가 포함된 기사는 총 295건이다. 그 내용을 통해 10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참극을 확인할 수 있다.

찢기고 밟히고…
잔악한 일본의 총칼

‘엘 파소 헤럴드(el paso herald)’ 1919년 3월 14일 1면


텍사스주의 지역지'엘 파소 헤럴드(el paso herald)’ 1919년 3월 14일 자 1면 머리기사로 일본의 잔인함을 알렸다. 베이징발 AP 기사를 인용해 한국인들이 보고 전한 일본군의 잔학한 만행을 상세히 전했다.

“한국의 독립시위에 참가한 한 소녀가 선언서를 들고 있자, 일본군은 그 소녀의 손을 칼로 잘랐다. 그러자 소녀가 다른 손으로 선언서를 들자 그 손마저 잘라버렸다.”

충격적인 증언은 계속 이어졌다. ‘데일리 알래스칸(The daily Alaskan)’은 4월 3일 1면 기사로 매클래치의 목격담을 전했다.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일본군이 서울 한복판에서 어린 한국 소녀들을 가죽끈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갔다”며 “소녀들은 벌거벗겨진 채 온갖 모욕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일본의 잔인함은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에게도 보고됐다. 당시 평양에 있던 미국인이 작성한 것으로, 시위가 시작된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두 명의 소녀가 머리채를 잡혀 끌려왔다. 그들은 머리카락이 전신주에 묶인 채 심한 구타를 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일본군에게 잡혀간 65세 남성은 걷지 못할 때까지 구타당했다. 감옥에 투옥된 후에도 형벌이 반복됐고 의식을 잃은 채 집으로 보내졌다."

보고서 작성자는 "평양은 지방보다는 가혹하지 않다"면서도 "직접 목격하고, 또 목격자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이 너무나 참혹해서 차마 글로 옮길 수 없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전국에 번지는 만세운동
붉게 물든 평화시위

애리조나 리퍼블리칸(Arizona republican) 1919년 3월 17일 자 1면, 이브닝 스타(The Evening Star) 3월 27일 1면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번졌고, 일본은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했다. 맨손으로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고, 참혹한 학살로 이어졌다.

3월 14일 자 AP는 상하이발 기사로 평안남도 지역에서 이어졌던 봉기를 보도했다. 3월 4일 하루에만 성천과 양덕, 안주 등에서 이어진 만세 시위에서 백여 명이 죽었다고 전한다.

“성천에서 3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당했고, 평양의 남쪽 ‘서흥*’에서 일본 헌병 4명이 시위대를 향해 탄약이 소진될 때까지 발포해 51명이 죽었다. 헌병 4명도 목숨을 잃었다. 평남 양덕에서는 교전으로 시위대 20명이 사망했다. 안주에서는 두 명의 여학생이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일본 경비병들이 즉각 총격을 가했고, 이 때문에 8명이 숨지고 30명이 부상당했다. 그중 4명은 위중한 상태다.”

AP통신은 3월 27일 필라델피아발 기사로 대한인국민회가 상하이에서 받은 전보를 전했다.

“한국 전역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일본의 군인들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만 명이 체포됐고, 고문과 학살이 벌어졌다.”

언론들은 “일제의 총칼은 남자와 여성, 어린이까지 찔렀고, 학교와 교회, 상점은 부서졌다”며 “한국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확인 결과, 서흥 지역에서 대규모 소요로 5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2일과 4일, 9일에 대규모 시위로 50여 명이 사망했고, 6일에는 맹산에서 50여 명이 사망하는 소요가 있었습니다.)

"대학살이 시작됐다"
그날, 서울에서 무슨 일이

‘토노파 데일리 보난자(Tonopah daily bonanza)’ 4월 12일 1면


“일본이 학살을 시작했다. 28일 서울에서 일어난 시위로 세 시간 동안 무장하지 않은 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고, 수많은 사람이 총에 맞고, 구타당하고 끌려갔다. 27일부터 수천 명이 죽었다.”

4월 12일에는 대학살 소식이 전해졌다. 샌프란시스코발 AP 기사는 서울에서 일어난 대학살을 전한다. 이는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서울에서 받은 전보로, 일본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해 3시간 동안 천명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소식은 27개의 언론에서 1면 머리기사로 비중 있게 보도하며 비극적인 한국의 상황을 주목했다.

미국 유타주의 ‘오그던 스탠다드(The Ogden Standard)’는 “일본인이 무장하지 않은 한국인 수천 명을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했다”며 일본의 잔혹함을 강조했다.

미국 네바다주의 지역신문 '토노파 데일리 보난자(Tonopah daily bonanza)' 역시 이 끔찍한 소식을 전하며 “남성들이 살해당하는 동안 여성들은 거리에서 발가벗겨지고 고문당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3월 28일 서울에서 일어난 소요로 천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에 대해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당시 한국의 소식은 중국과 일본 등을 거쳐 해외로 전해졌는데, 중국을 통한 기사의 경우 일제의 만행이 특히 강조되며 규모나 숫자는 일부 과장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어 “정확한 숫자는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일제의 만행이 있었고, 이런 만행을 계획한 일본의 의도”라고 강조했다.

세계가 경악한 제암리 학살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가 촬영한 사진


일제의 만행은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은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집중 사격을 명령한다. 이들은 집단 학살을 벌인 후, 민가를 모두 태워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규모 진압 소식을 들은 미국 영사는 테일러 AP통신 기자,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과 함께 현장을 찾았다.

제암리 사건은 4월 23일 서울발 AP 기사를 통해 알려진다. 일본군이 서울에서 45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의 남성들을 교회에서 살해했고, 조선총독부가 이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 파소 헤럴드(el paso herald)’ 6월 14일 1면


5월 1일 도쿄발 AP 기사는 사건을 더 구체적으로 전달했다. 제암리 현장을 방문했던 AP 특파원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도착했을 때, 40가구가 있는 마을에 오직 4~5가구만 남아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폐허로 변했다. 교회 안에서 참혹하게 불타 뒤틀어진 시체를 발견했다. 교회 밖에서 발견된 또 다른 시체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다.”

제암리 사건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영사관을 통해 본국에 보고됐고, 선교사들도 각종 보고서로 한국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렸다. 특히 스코필드 선교사는 현장의 사진과 주민들의 증언을 기록했고, 신문에 익명으로 기고했다. 이런 노력은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쏟아지는 증언
숨길 수 없는 진실

‘해리스버그 텔레그래프(Harrisburg telegraph)’는 7월 12일 1면


일제의 잔악함은 미국 장로회의 발표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의 지역지 ‘해리스버그 텔레그래프(Harrisburg telegraph)’는 7월 12일 1면 기사를 통해 그 내용을 보도한다.

“어린아이들은 채찍에 맞고, 살갗은 불에 태워졌고, 희생자들은 기절을 반복하고, 새로운 고문에 시달렸다.”

기사는 만세를 외치다 끌려간 시민들이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말해준다. 19살의 한 소년은 6시간 동안 달궈진 쇠로 살갗을 태우는 고문을 당했고, 기절할 때까지 구타당했다. 남자들은 극심한 구타를 당했고, 여자들은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고 전한다.

일본은 자신들의 이런 만행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뉴스를 검열하며 단속을 강화했다. 하지만 한국의 참상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은 계속 이어졌다.

한국을 방문했던 ‘시카고 데일리뉴스’ 특파원 윌리엄 자일스(WILLIAM R. GILES)는 이후 베이징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일제의 잔혹함에 대해 발표한다. ‘이브닝 스타(The Evening Star)’에 실린 6월 17일 자 기사에서 그는 “3개월간 한국을 여행하며 일본의 실정과 고문, 무고한 학살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50마일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본군이 계곡을 둘러싸고 입구를 막은 채 도망가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이 사태로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죄 없는 사람들도 체포됐고 재판도 없이 태형을 당한 후에야 풀려났다. 붙잡힌 사람들은 잔인하고 비참하게 다뤄졌다. 그는 한국인에 대해 “도살장으로 내몰린 양과 같다”며 “2만 명의 신음이 무시되고 있다”고 기록했다.

미국 메인주 벨파스트의 지역신문 '리퍼블리칸 저널(The Republican journal)'은 7월 31일 자 기사에서 한국에서 활동했던 목사의 증언을 전한다. 그가 본 한 남성의 시신은 귀가 잘리고, 온몸에 28개의 상처로 참혹한 상태였다. 그는 단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이런 일을 당했다.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시작된 평화시위는 일제의 총칼 앞에 찢기고 밟혔다. 하지만 그 외침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그들의 만행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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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원 기자 (hey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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