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우리 아이들은 학교·병원도 못 간다"..혐오와 탄압, 결국 학살로

전현진 기자 입력 2019.02.15. 06:00 수정 2019.02.1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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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로힝야 학살 보고서 ③]·뿌리 깊은 차별과 박해

2016년 11월5일 미얀마 무장경찰들이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 북쪽의 로힝야 거주지 쿠텐콱 마을에서 남성 주민들을 한곳에 앉혀놓고 발길질하고 있다. 2017년 8월 집단학살이 벌어지기 전에도 미얀마 정부의 탄압은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이 영상은 한 무장경찰이 이 장면을 배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유튜브 캡처

로힝야 주민 다수가 정규교육 못 받고 학교선 ‘검둥이’라 불려 허가증을 받지 않고 결혼했다는 이유로 5년간 구금당하기도 미얀마군, 기도하면 체포하고 종교적 이유로 기른 수염도 깎아 “변화 위해 아웅산 수지에게 투표했는데…” 시민권도 박탈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로힝야 마을 춧핀 출신인 마스민(28·가명)의 자녀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인근 두 곳의 초등학교에 로힝야 아이들은 다닐 수 없다. 마스민은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도, 시장에도, 병원에도 가지 못한다”며 “불교도에겐 자유가 있지만 우리 무슬림(이슬람교도)에겐 자유가 없다”고 말했다. 마스민의 자녀들은 2017년 8월27일 마을에 몰려온 군인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2017년 8월 말 로힝야 마을에서 잇달아 벌어진 집단학살은 갑자기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미얀마 군부는 ‘테러리스트 토벌’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앞서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오래전부터 자행했다. 혐오와 차별, 탄압이 총칼을 휘두르며 목숨을 앗아가는 학살로 이어졌다. 로힝야는 그동안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고 자유로운 행동과 기본적 권리를 제약하는 미얀마 정부의 체계적인 박해를 견뎌내야 했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가 만든 로힝야 학살 보고서에는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에 대해 시행한 체계적인 인종 말살 정책이 담겨 있다. 경향신문이 입수해 분석한 아디의 로힝야 5개 마을(뚤라똘리, 인딘, 돈팩, 쿠텐콱, 춧핀) 학살 보고서에서 주민들은 2012~2016년 겪은 차별과 박해를 증언했다. 2012년은 로힝야 거주 지역인 라카인주에서 불교도인 라카인 주민들과 로힝야 주민들이 충돌한 해다. 2016년 라카인 북부에서 미얀마 경찰초소가 습격당했고, 이후 로힝야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 교육·결혼·종교도 제한

로힝야 마을 주민들은 대체로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아디와 인터뷰한 춧핀 마을 주민 40명 중 9명만 학교를 다녔다. 9명 중 5명은 초등교육을 마치지 못했다. 최고학력은 10학년(고1)이었다. 뚤라똘리 마을에서도 78%의 주민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로힝야 학생들은 대학입학 시험도 치를 수 없었다.

학교에서도 차별이 이어졌다. 라카인주에 사는 타민족 출신 교사와 학생들이 로힝야 학생들을 차별했다. 로힝야들이 모여 사는 라카인주에는 로힝야 외에 다른 소수민족들도 살았다. 대부분 불교도인 이들은 주로 이슬람교도인 로힝야를 핍박하고 혐오해왔다. 학교에선 로힝야들이 방치됐다.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수업이 진행됐다. 교사와 학생들은 로힝야를 인종주의적 혐오표현인 ‘칼라’(Kalar, 검둥이)로 불렀다.

춧핀 마을 출신 농부 바하마드(33·가명)는 중학교까지 마쳤지만, 마을에 고등학교가 없어 진학은 못했다. 고등학교가 있는 라카인 마을은 무슬림에게 출입이 금지됐다. 관공서에서 직업을 구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바하마드는 “일자리를 구할 때 차별을 받는다. 무슬림에겐 어떤 일자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교육받은 무슬림 역시 마찬가지다. 나도 로힝야가 일자리를 구한 걸 본 적 없다”고 했다.

종교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약받았다. 불교도가 다수를 점하는 미얀마에서 이슬람교인 로힝야는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할 수 없다. 보통 종교활동은 마을의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를 드리거나 경전을 읽는 방식으로 이뤄지지만,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게 했다. 주민 5명 이상의 모임이 금지됐고, 종교활동도 할 수 없었다.

돈팩 마을 주민 알리힘(61·가명)은 “경비대들이 마을 주민들의 종교활동을 금지했다. 그들은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기도하면 몰려와 때리고 체포해갔다”고 말했다. 종교활동을 못하게 하려고 감시하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기른 수염을 강제로 깎아버리기도 했다.

■ 아웅산 수지 위해 투표했지만…

뚤라똘리 마을 출신 베름(25·가명)의 남편은 허가증을 받지 않고 결혼했다는 이유로 5년간 구금됐다. 로힝야는 결혼을 하려면 마을행정관에게 10만짯(약 7만3000원)가량을 내고 추천서를 받은 다음, 군대에서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허가증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다. 베름의 남편은 출소 후에야 허가증을 받았다. 자녀들을 가족으로 등록하기 위해 6만짯(약 4만4000원)을 내야 했다. 베름이 경험한 것은 대부분의 로힝야들이 겪는 일이다. 이 절차는 로힝야에게만 적용된다. 불교도인 다른 소수민족에겐 불필요한 절차다.

이동도 철저히 통제됐다. 병이 들거나 다쳐도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보건소 등 정부가 운영하는 의료기관은 로힝야에 대한 치료를 거부했다. 치료를 해주더라도 다른 환자보다 더 비싼 비용을 내도록 했다. 한 춧핀 마을 주민은 질병이 심각한 환자들은 국경을 몰래 넘어 방글라데시로 가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이마저 적발되면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투표 참여도 불가능하다. 2015년 총선 이후 로힝야의 투표권은 대부분 박탈됐다. 인딘 마을 출신 나흐맛(35·가명)은 좀 더 나은 변화를 위해 2015년 무렵 아웅산 수지 현 미얀마 국가자문역에게 투표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나아진 건 없었다. 나흐맛은 그 후 투표권을 잃었고, 2017년 8월25일에는 마을로 들어온 군경에게 남편도 잃었다.

미얀마의 군대나 정부는 일자리가 없는 로힝야를 강제 동원해 노동력을 사용했다. 시민권을 박탈한 뒤 일종의 임시 신분증인 국적확인카드 등록을 강요했다.

아디는 이러한 탄압을 막으려면 우선 미얀마 정부가 공정한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탄압을 주도한 정부는 로힝야의 존재조차 부인한다. 아디는 이런 상황에서 차별과 탄압, 학살 문제를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거나 특별재판소를 설치해 진상조사를 벌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사 대상에 집단 학살 사건뿐만 아니라 사회제도적으로 추진된 탄압 행위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입법·행정 조치를 도입해 로힝야에 대한 차별적 제도와 관행을 철폐할 필요가 있다고 아디는 지적했다. 미얀마 시민들을 대상으로 혐오와 차별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로힝야에 대한 집단 학살과 사회적 탄압이 뿌리 깊은 혐오감에서 유발됐다고 봤기 때문이다.

학살 보고서는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미얀마 정부는 피해자에게 권리구제 수단을 제공해야 하며, 집단학살 책임자 조사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면책 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과거사 사건 처리 사례에서 기록의 중요성 배워 아이들 손에 총보다 펜을 쥐여줘야 로힝야 미래 있어” |난민 증언과 증거 수집해 보고서 만든 ‘아디’ 김기남 변호사

지난해 6월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의 김기남 변호사(왼쪽)가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뚤라똘리 마을 출신 주민을 인터뷰하고 있다. ⓒ조진섭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는 로힝야 마을의 참상이 잊혀지기 전 증언·증거를 수집하려고 ‘로힝야 집단학살 보고서’를 만들었다. 향후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소 등 책임자 처벌 과정에 제출하려고 한다. 아디는 학살 생존자이자 피해자인 로힝야 난민들과 인터뷰해 구체적인 피해 내용을 기록하고 증거를 모았다.

아디에서 ‘로힝야 집단학살 기록사업’을 담당하는 상근활동가 김기남 변호사(42)는 한국의 과거사 사건 처리 사례에서 이번 보고서 작성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다. 김 변호사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국내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제주 4·3,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등 사례를 보면 진상규명을 위한 증거 확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관련 증거를 꾸준히 수집했다면 지금 어땠을까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훼손되기 전 증언과 증거를 기록에 남겨 보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이다.

한국, 르완다, 캄보디아 등 세계 각국에서 집단학살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기록은 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 변호사는 이 기록 작업이 ‘과도기적 정의’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과도기적 정의는 인권탄압 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구제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최근 방글라데시의 난민캠프를 방문한 김 변호사는 로힝야 아동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는 “난민캠프에 40만명에 달하는 로힝야 아동들이 살고 있는데 아주 기초적인 교육만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국제활동가 회의에 참석한 소식도 전하며 “많은 전문가들은 이 아이들이 상황을 비관해 급진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면서 “아동들 손에 총을 쥐여주기 전에 펜을 쥐여줘야 로힝야에게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고 했다.

영국의 식민지배 시기 로힝야가 버마족 등 불교도를 탄압하는 데 동참했기 때문에 오늘날 학살이 벌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미얀마 주류의 관점이 그렇다. 로힝야 관련 국내 기사 댓글에서도 이 같은 주장을 볼 수 있다.

김 변호사는 “잘못된 사실을 근거로 현재 벌어지는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했다. 로힝야를 탄압해온 미얀마 군부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과거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최근 (한국 사회 일각의) 로힝야에 대한 혐오도 그들이 ‘불법체류자’라는 왜곡된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서 “이는 로힝야가 시민권자였고 그 권리를 법원 판결로 인정받았으며 미얀마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된 공식적인 역사와 인식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 변호사가 속한 아디는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현지 활동가와 인권침해 생존자를 지원하는 사업을 벌인다. 이 단체는 로힝야 난민들이 스스로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한다. 김 변호사는 “아디의 사업이 끝나도 현지 조사관들이 스스로 기록 사업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로힝야 커뮤니티가 스스로 공동체를 다시 복원할 역량을 키울 수 있기를 기원한다. 아디도 작지만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시리즈 끝>

※인터랙티브 스토리로 로힝야 보고서 만난다

경향신문은 아디가 작성한 로힝야 마을 학살 보고서를 디지털 인터랙티브 스토리로 제작했다. 학살 당시 화재로 불탄 마을 현장 사진과 영상, 위성 지도, 생존자 증언을 담았다. 다음 주소(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9/rohingya/)에서 볼 수 있다. PC는 경향신문 홈페이지 중간 ‘#디지털’ 배너, 모바일은 하단 ‘#디지털’ 배너로 들어가면 된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