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1700명 중 400명이 불법체류자.."그들 없인 농사 불가"

위성욱 입력 2019. 2. 19. 00:07 수정 2019. 2. 1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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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과수원·어촌 등 대거 고용
불길 뚫고 90세 노인 구한 미담도
화성 공단 1만5000명이 불법체류


몰려드는 불법체류 <하> 불법체류자에 의존하는 농어촌

니말. [뉴스1]
“가족이 불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불법·합법을 따지겠나. 그런 마음으로 할머니를 꼭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길이 번진 집으로 뛰어들어가 90세 할머니를 구한 니말 시리 반다라(40·스리랑카)가 한 말이다.

니말은 2017년 2월 자신이 일하던 경북 군위군 고로면의 한 과수원 인근 주택에서 불이 나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 할머니를 구했다. 2011년 비전문취업(E-9) 자격으로 입국한 니말은 2016년 7월 체류 기간이 만료돼 당시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의로운 행동 덕분에 니말은 불법체류자 신분임에도 의상자로 인정됐다. 또 지난해 12월엔 영주(F-5) 자격까지 얻었다.

니말은 고로면의 한 과수원에서 가족 생계를 위해 일해 왔다. 실제 니말처럼 농어촌과 공장 지역에는 가족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일하는 불법체류자가 많다. 그들은 이미 국내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불법체류자들이 지난해 10월 강원도 한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주민 1300여 명 규모의 한 농촌 마을에서는 지난 가을 약 400명의 불법체류자가 농사일을 했다. 지난해 10월 말 그 마을에서 만난 수안(39·여·가명)은 태국에서 교사였다. 고향에 10살 딸과 7살 아들이 있다. 수안은 양구에서 한 달에 170만원 정도를 번다. 이 돈 중 100만원은 태국으로 보내고, 월세와 식비로 50만원을 쓴다. 나머지 20만원은 저축한다. 농장 주인 박모(52)씨는 18일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 이들이 없으면 농사짓는 게 불가능하다”며 “지금은 일이 없어 불법체류자들이 많이 나갔지만 봄이 되면 다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 목포와 신안 등 어촌도 비슷하다. 장기간 바다에서 머물러야 하고 고된 뱃일 특성상 한국인 선원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져 불법체류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한 번 출항 때 짧게는 9일, 길게는 12일 이상 조업하는데 한국인에게는 300만~400만원을 줘야 하지만 불법체류자는 150만~200만원이면 된다.

지난해 말 전남 완도의 매생이 양식장에서 일하는 동남아 국적 불법체류자들이 어구를 정리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경기도 화성시의 공장 지역은 불법체류자들이 없으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는 화성시에만 5만 명이 넘는 외국인근로자가 있는데 이 중 1만5000명 정도가 불법체류자인 것으로 보고 있다.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한윤수 소장은 “이제는 대책 없는 단속보다는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며 “단속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합법적으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까지 외출을 하지 않아 공장은 물론 주변 상인들까지 큰 타격을 입는다”고 말했다.

무리한 단속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미얀마 출신 불법체류자 탄저테이(25)는 지난해 8월 경기도 김포시의 한 건설 현장에서 출입국관리 공무원들의 단속을 피하던 중 7.5m 높이의 공사장 아래로 추락했다. 뇌사 상태에 빠진 그는 17일 후인 9월 8일 숨졌다.

현재 합법적으로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는 고용허가제도가 있지만 오히려 불법체류자를 만드는 통로가 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비전문취업 E-9)의 경우 폐업과 임금체불 등과 같은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만 이직이 가능하다. 또 최장 4년10개월까지 일한 뒤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정적인 고용과 거주가 보장되지 않다 보니 불법체류를 선택하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2013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비전문취업 비자로 들어왔다가 불법체류와 불법취업 등으로 강제퇴거된 외국인은 2만4462명에 달한다.

이혜경 배재대 공공인재학부 교수(한국인구학회 회장)는 “현재 농산어촌에는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 부분을 불법체류자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우리나라 사업체 조사는 기본적으로 5인 이상 업체를 대상으로 하는데 농어촌은 대부분 5인 미만 사업자라 사실상 기본적인 통계조차 파악이 안 됐다. 이제라도 농어촌의 인력난이 얼마나 심각한가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조사를 통해 고용허가제 쿼터 등을 현실화하는 등 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머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위성욱·김민욱·박진호·최종권·김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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