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 더 작아지는 이주민..이주인권의 '걸림돌·디딤돌' 판결은?

허진무 기자 2019. 2. 2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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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해 12월 경기 안산시 원곡동 이주노동자 쉼터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캄보디아 청년들이 소등시간인 밤 11시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은 법정에 서면 더욱 작아진다. 한국 ‘국민’에게 보장되는 여러 권리가 이주민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한국어가 서툴고 법과 제도를 잘 모르는 이주민에게 법정은 특히 두려운 곳이다. 어딘가를 떠나 한국에 온 이들은 다시 어딘가로 떠나야 하지는 않을지 속이 탄다.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은 2017~2018년 이주인권에 ‘디딤돌’과 ‘걸림돌’이 된 법원·헌법재판소 판결을 연구해 20일 오후 발표했다.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은 2017년 10월 창립돼 공익적 목적으로 이주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공익변호사단체·이주인권단체 등에 소속된 법률가와 연구자들이 참여한 모임이다.

모임 소속 변호사 33명은 2018년 9월14일부터 2018년 10월17일까지 124개의 판결문·결정문을 살펴본 뒤 ‘디딤돌 판결’, ‘걸림돌 판결’, ‘주목할 판결’을 각 9개씩 총 27개를 선정했다. 판결의 영향력, 이주민 관련 법령에 대한 이해, 이주인권에 대한 이해, 참신성·발전성, 구체적 타당성 등 5가지의 기준으로 이주인권에 긍정적 역할을 한 판결은 ‘디딤돌 판결’, 부정적 역할을 한 판결은 ‘걸림돌 판결’, 긍정적·부정적 요소가 혼재돼 있거나 계속 주시해야 하는 판결은 ‘주목할 판결’로 구분해 선정했다.

■“난민신청자 변호인 접견 거부는 위헌” 이주인권의 ‘디딤돌’

수단 난민 ㄱ씨는 2013년 11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입국심사에서 난민신청 의사를 밝혔다. 인천국제공항 측은 ㄱ씨가 갖고 있던 사증이 입국 목적에 맞지 않는다며 입국 불허 결정했다. 항공사에 ㄱ씨를 되돌려 보내라는 송환지시서를 발부하고 환승구역 내 설치된 송환대기실에 수용했다.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장은 같은 달 ㄱ씨를 난민인정심사에 ‘불회부’하기로 결정하고 계속 송환대기실에 수용했다. ㄱ씨는 대기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공중전화 외에는 외부와 소통 수단이 없었다. 변호인은 2014년 4월 송환대기실에 갇혀 있던 ㄱ씨를 만나려고 접견을 신청했다.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장은 입국불허자에게 변호인 접견을 인정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접견 신청을 거부했다.

헌법재판소는 결정(2014헌마346)을 통해 “송환대기실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수용된 난민신청자에 대해 헌법상 변호인접견권이 인정되므로 접견 신청을 거부한 것은 위헌”이라고 했다. 이 결정은 ‘구금’ 상태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헌법상 권리는 법률 조항이 없더라도 헌법에서 나오는 기본권이라고 봤다. 난민신청자의 지위가 가장 취약한 ‘입국 전 구금상태’에서 절차적으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확인한 것이다.

이주인권의 ‘디딤돌’로 선정한 판결은 결혼 이주민의 체류자격 연장 허가를 위해 ‘혼인의 진정성’을 판단할 때는 단순히 부부의 별거 여부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혼인 유지 의사와 가족관계 등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판결(서울고법 2017누88154), 난민인정자의 귀화허가를 판단할 때는 난민의 특수성과 취약성을 고려해 일반 외국인보다 완화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판결(서울고법 2017누34881), 난민인정자는 난민협약 및 난민법에 따라 한국 국민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판결(부산고법 2017누22336) 등 9개 판결이었다.

■“아동성범죄로 출산한 사실 남편에게 알려야” 이주인권의 ‘걸림돌’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 ㄴ씨는 소수민족인 ‘따이족’ 출신이었다. 따이족 사회에는 남성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성을 납치한 뒤 결혼 허락을 받는 ‘빳버혼’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ㄴ씨는 13살 때 이웃 동네에 갔다가 자신을 납치한 남성과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이후 마을을 떠난 ㄴ씨는 아이와의 연락도 끊어졌다. 9년 뒤 ㄴ씨가 한국인 남편과 국제결혼할 때 중개업자는 ㄴ씨가 출산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ㄴ씨는 남편의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시아버지는 ㄴ씨를 2차례 성폭행하고 1차례 성추행했다. ㄴ씨의 고소로 시아버지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 과정에서 ㄴ씨의 출산 경력이 드러나게 됐다. 남편은 ㄴ씨에게 혼인 취소 소송을 내고 위자료를 요구했다. 1심과 2심은 모두 혼인 취소와 위자료 지급을 판결했다. 대법이 원심을 뒤집었지만 파기환송심은 다시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전주지법(2016르220, 227)은 “사기로 인한 혼인”이라며 “빳버혼을 통해 출산했다고 고지 의무를 면제하면 배우자는 혼인·출산 경력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혼인에 관한 의사결정의 자유를 제한받게 된다”며 혼인을 취소했다. 대법은 아동성범죄 풍습처럼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경우 출산 경력이 사생활 비밀로 보장될 부분이라고 봤다. 전주지법은 납치 직후 성폭행으로 출산한 것이 아니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강제혼의 피해자에게도 ‘고지 의무’의 책임을 물은 판결이다.

이주인권의 ‘걸림돌’로 선정된 판결은 동성애자의 난민신청에 대해 성적 지향 공개로 일어난 구체적인 박해를 요구하며 난민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판결(대법 2016두56080), 외국에 거주하는 미성년자 자녀에게 양육비를 지급하면 한국에 결혼이민으로 체류할 자격이 없다는 판결(서울고법 2017누6776), 임금체불만으로는 외국인 노동자가 근무처를 변경할 수 없고 임금체불로 고용주와 피고용주 사이의 신뢰관계가 파탄나야 한다는 판결(서울행정법원 2017구단9145) 등 9개 판결이었다.

로힝야 여성이 지난해 6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집단학살을 증언하다 괴로워하고 있다. 이 여성이 살던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쿠텐콱 마을에선 최소 148명의 로힝야 주민이 미얀마 군인들에게 숨졌다. 10세 미만 희생자도 33명으로 추산됐다. ⓒ조진섭

이주인권을 위해 ‘주목할 판결’에는 기한 없이 이민자를 구금할 수 있는 출입국관리법 제63조 1항에 대한 위헌제청에서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이 위헌의견을 제시했지만 정족수인 6명에 미치지 못한 합헌 결정(헌법재판소 2017헌가29)이 선정됐다. ‘남용적 난민신청자’도 사실상 국내에 체류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체류기간연장불허결정과 출국명령은 적법하다고 한 판결(서울행정법원 2016구단63234), 귀화허가는 법적 근거 없이 취소할 수 없다는 판결(서울행정법원 2016구합84559), 귀화 신청자의 자산이 3000만원 이상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귀화신청을 거부한 처분은 위법하다는 판결(서울행정법원 2017구합3816) 등 9개 판결이 선정됐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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