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전 베트콩 '구정 대공세'..전투 졌지만 전쟁 이겼다
군사적 패배해도, 반전 분위기로 정치적 승리
북베트남군·베트콩, 68년 설날 새벽 기습 공격
4만5000명 숨지고 게릴라 궤멸돼 군사적 실패
미국서 반전 분위기 확산하며 전세 역전
미국, 협상 나서 73년 파리협화협정 맺어
닉슨 종전선언과 미군 철수 2년 뒤 공산화
군사력·경제력 앞서도 심리전 밀려 패전
김정은, 호치민 주석 묘소 참배 확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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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줌업
오는 27~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차 북미정상회담을 여는 베트남은 ‘전투에선 밀려도 전쟁에선 이긴 역사’를 간직한 땅이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 베트남에서 벌어졌던 ‘구정 대공세’의 교훈이다.
설날 새벽 100개 도시 동시 다발 기습
구정 대공세는 정확하게 51년 전인 1968년 1월 30일부터 9월 23일까지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인민해방전선(베트콩 또는 비엣콩)이 3단계에 걸쳐 남베트남 전역의 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기습 공격한 전투다. 베트콩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반군 게릴라 조직이다. 이들이 8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 기습 공격을 벌인 첫날이 경계가 허술했던 설날(베트남어로 뗏 Tết) 새벽이라 ‘구정 대공세’로 불린다. 수도 사이공을 포함한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 100개 이상의 도시를 기습 공격했다. 이들이 3단계 전체에 걸쳐 동원한 병력은 32만3000~59만5000명으로 추정된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궤멸 상태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져 민간인 피해가 막심했다. 약 1만4000명이 목숨을 잃고 2만4000명이 부상했으며 상당수 주택도 파괴됐다. 기습을 당한 남베트남군과 미군, 한국군 등 연합군의 피해도 작지 않았다. 남베트남과 미국 자료에 따르면 2월까지 계속된 1단계 공격에서만 남베트남군·미군·한국군·호주군·태국군 9078명이 숨지고 3만5212명이 부상했으며 1530명이 실종됐다. 당시 남베트남에는 약 130만 명의 병력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맞섰다.
1954년 프랑스 몰아낸 전투 주인공이 기획
구정 대공세를 주도한 사람은 북베트남의 호찌민(胡志明·1890~1969년) 초대 주석과 보응우옌잡(武元甲·1911~2013년) 국방부 장관이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을 통해 전세를 한 번에 뒤집으려는 의도에서 기획한 작전이었다. 보응우옌잡 장군은 1954년 베트남 북서부에서 프랑스 식민지 군대를 기습 공격해 승리를 거둔 ‘디엔비엔푸 전투’의 주인공이다. 이 전투의 결과 그해 제네바 협정에서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을 약속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베트남 독립을 막으려던 프랑스와 베트민이 벌인 ‘1차 베트남전쟁(1946년~1954년)’은 이렇게 종결됐다. 하지만 그 뒤 떠난 프랑스군을 대신해 미군이 주도하는 2차 베트남 전쟁(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 2차 베트남 전쟁의 시작은 제네바 협정 직후인 1954년,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1959년,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군이 북베트남을 폭격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시작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종결 시기에선 이견이 없다.
전쟁 중 쿠데타로 권력투쟁 벌인 남베트남
아무튼 프랑스와 영국·미국은 물론 공산권인 중국도 참가하고 소련도 동의한 제네바 협정의 결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북부의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베트남국(남베트남)으로 분단됐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패배하자 베트남 독립동맹회(비엣민 또는 베트민)가 북부지역을 장악해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언한 국가다. 베트민(越盟)은 1941년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이 함께 결성한 조직이다. (한국에선 1970년대까지 북베트남을 ‘월맹’으로 불렀다.)
제네바 협정 뒤 프랑스군을 대신해 미군이 베트남에 군대를 보냈다. 베트남국은 명목상의 베트남 황제로 프랑스의 허수아비였던 바오다이(保大·1913~1997년) 황제가 형식적으로 지배했다. 베트남국의 응오딘지엠(吳廷琰·1901~1963년, 고딘디엠으로도 불림) 총리는 인기 없던 바오다이 황제를 1955년 국민투표로 폐위시키고 베트남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1963년 군사 쿠데타 직후 군부에 의해 총살당했다) 남북 베트남은 계속 충돌했고 미군과 한국군을 포함한 외국군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등 군사적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갈수록 가열됐다.
1968년의 구정 대공세는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역설적이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게릴라전의 고전인 야간기습을 중심으로 공격했지만, 게릴라전의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 소화기만 지닌 대규모 게릴라 병력이 도시의 정규군을 공격하는 작전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 미군과 한국군을 비롯한 외국군은 처음엔 의외의 기습공격 허를 찔리는 듯했지만 이내 전투를 주도했다. 전투 결과는 북베트남에 절망적이었다. 9월까지 4만5000명 정도의 병력을 잃었으며 특히 남베트남에 침투했던 게릴라 병력은 거의 궤멸해 씨가 마를 지경이 됐다. 전투에선 처절한 패배였다.
전투 승리 아닌 협상 유도용?
그렇다면 군사적으로는 너무나도 결과가 뻔한 구정 대공세에 나섰던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도대체 무엇을 노렸을까. 1954년 기습공격으로 이뤘던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가 결국 협상으로 이어져 제네바 협정과 프랑스군 철수로 이어졌던 역사를 반복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처음부터 전투에서 승리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리 경계가 느슨한 설날 명절 새벽을 이용해 기습 공격으로 상대의 허를 찌른다고 해도 전투에서 이기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호찌민 주석과 보응우옌잡 장군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남베트남과 미군·한국군·호주군·태국군 등 연합군은 북베트남과 베트콩보다 병력과 무기체계, 보급과 경제력에서 크게 앞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노렸을까. 이 전투를 통해 남베트남군과 연합군, 그리고 남베트남 국민을 공포에 질리게 할 수는 있었다. 특히 이전까지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던 설날 새벽에 공격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는 편안한 밤이 없다’는 경고를 날리는 효과를 주기에 충분했다. 호찌민 주석과 보응우옌잡 장군은 군사력으로는 전투에 이길 수는 없지만 이런 효과는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을 수 있다. 군사력이 우수한 남베트남과 미국에서 먼저 ‘전쟁 대신 평화’라는 비명이 터져 나오면 군사력이 열세인 북베트남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민중 봉기를 유발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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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전으로 이기려는 시도
이를 바탕으로, 구정 대공세가 군사력이 모자란 북베트남이 이러한 심리전과 선전전으로 전쟁에 이기려는 시도라는 평가도 할 수 있다. 그 뒤의 결과가 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북베트남이 패배한 이 전투는 역설적이게도 북베트남에 전쟁 승리를 안긴 전기가 됐다.
이 전투를 계기로 특히 미국에선 전쟁에 싫어하고 염증을 내는 염전(厭戰)과 혐전(嫌戰)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반전을 입에 달고 다니지 않으면 아니면 지성인이 아닌 거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를 징집해 베트남에 파병하고 항공모함과 전폭기·폭격기 등 고가의 첨단 무기체계까지 동원해 북베트남을 폭격했는데도 그들의 군사력을 궤멸하지도, 전쟁 의지를 꺾지도 못하고 그렇게 기습 공격까지 당했느냐는 비난이 줄을 이었다. 미국은 구정 대공세라는 전투에 이기고도 내부의 적에게 등을 찔린 형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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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서유럽에선 반전운동 대대적 확산
구정 대공세 뒤 미국에선 베트남 전쟁에 대한 환멸감이 확산하고 반대 운동이 널리 퍼져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위와 병역기피가 만연했다. 미군 사기도 떨어져 불복종과 탈영이 줄을 이었다. 1969~70년 징집병 가운데 보병 근무 희망자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ROTC 지원자는 1966년 19만1749명에서 1971년 7만2459명으로, 1974년 사상 최저인 3만3229명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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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한 군사력 활용 못하고 협상 나서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1908~1973년, 재임 1963~1969년)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으며,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왔던 조지 맥거번 사우스다코다주 연방 상원의원은 미군의 즉각적인 베트남 철수까지 주장했다. 결국 미국은 구정 대공세가 벌어진 1968년 평화협상에 나섰으며 1969년 베트남 주둔 미군 감축에 나섰다.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 남베트남 임시정부(베트콩의 정치조직),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파리 평화협정’이 조인됐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1913~1994년, 재임 1969~1974년)은 협정 이틀 뒤인 1월 29일 ‘베트남전 종전 선언’을 했으며 그해 3월 29일까지 모든 미군을 남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78년 노벨평화상은 파리평화협정의 공로로 당시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와 베트남의 공산당의 남부 중앙국 부서기였던 레득토(黎德壽·1911~1990년)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레득토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평화협정 잉크도 마르기 전에 대대적 공세
레득토의 말대로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으로도 평화는 오지 않았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평화협정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974년부터 미군이 없는 남베트남에 공세를 계속해 결국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입성했다. 베트남 전쟁의 시작 시기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1975년 4월 30일 베트콩 전차부대가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현재 호찌민시)의 대통령궁 진입이 전쟁의 끝이라는 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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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심리전으로 승리 거둬
키신저는 유사시 남베트남을 지원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68년 북베트남의 호찌민 주석과 보응우옌잡 국방부 장관이 벌였던 구정 대공세는 결국 이런 결과를 빚었다. 전쟁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의지와 심리전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베트남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오는 27~29일 벌이는 정상회담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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