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만의 KT 화재 원인 '환풍기 제어반'..다른 가능성은?

강푸른 2019. 2. 24.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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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대란' 화재의 허무한 결론

지난해 11월 '통신 대란', '결제 대란'을 불러일으켰던 KT 아현지사 화재. 화재 발생 석 달 만에 서울소방재난본부가 내놓은 보고서의 결론은 너무 허무해서 더 놀라웠습니다. 단순 재산 피해액만 75억 원을 넘겼던 대규모 화재가, 고작(?) 지하 통신구 안 환풍기 제어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권은희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서울소방재난본부(이하 소방본부)는 KT 아현지사 화재가 '인입 통신구'의 환풍기 제어반 안에서 전기적 발열로 인해 시작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 '인입 통신구'가 뭐길래?

인입 통신구는 KT 아현지사 국내 통신망(사내 통신망)과 충정로 사거리 부근에 매설된 주 통신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 통신구가 '고속도로' 혹은 '동맥'이라면, 인입 통신구는 그 고속도로로 가기 위한 골목길, 또는 모세혈관과 비슷합니다. 길이도 112m로 매우 짧습니다.


이 인입 통신구 안에는 통신·전력 케이블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한쪽 벽면에는 환기를 위해 환풍기와 환풍기 제어반이 설치돼 있습니다. 환기구는 약 20cm 크기. 우리가 평소 중화요릿집 부엌이나 상가 화장실에서 흔히 보는 바로 그 환풍기입니다. 문제는 일정 시간마다 한 번씩 환풍기로 전류를 흘려보내 작동시키는 제어반에 있었습니다.


■ "그래도 못 미더워"... 다른 가능성은?

지난 23일, KBS는 단독 입수한 소방 보고서를 통해 KT 아현지사의 가장 유력한 화재 원인이 환풍기 제어반이라는 사실을 보도해 드린 바 있습니다.
([바로가기] [단독/앵커의 눈] ‘75억 피해’ KT 화재…“환풍기 제어반서 발화”)
또 화재 당시 KT 자회사 소속인 아현지사 경비원이 '먼저 소화기로 직접 불을 끄려고 시도하고, 실패하면 119에 신고하라'는 KT 자체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면서 119 신고가 12분가량 늦어졌다는 정황도 전해드렸습니다.
([바로가기] [단독] 119 신고까지 5단계…“12분 지연, KT 화재 피해 키웠다”)

하지만 기사가 나간 뒤 포털 사이트 댓글난에는 다른 가능성을 의심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습니다. 고의로 누군가 불을 냈을 가능성을 의심할 수 없다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소방 보고서에는 방화부터 실화 등,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검증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① 고의로 불을 냈을 가능성(방화)
보고서는 단 세 문장으로 방화 가능성을 일축했습니다. 실제로 화재 진압을 할 때도 잠긴 내부 철문을 열고 들어갈 만큼, 철저히 보안이 지켜지는 구역이라 외부인이 침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작다는 겁니다. KT 텔레캅에도 별도의 출입 신호는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맨홀 뚜껑을 열고 들어가는 것 역시 내부 진입이 쉽지 않은 구조라는 이유에서 배제됐습니다.

② 담뱃불 유입 등 부주의(실화)
사고 당일, 인입 통신구에 작업 등의 이유로 드나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로 표면에 설치된 철제 맨홀 뚜껑을 누군가 열어본다 해도, 그 안에 덮개가 하나 더 있어서 담배꽁초가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환기구는 어떨까요? 일직선이 아닌 고리 모양으로 휘어져 있어 불에 탈 만한 물질이 안으로 들어오기 쉽지 않습니다. 소방 당국은 실화 가능성도 매우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③인화성 가스에 의한 발화
화재 당시 '펑'하는 폭발음을 들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불길이 번진 양태도 가스 폭발로 인한 화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가스 폭발로 불이 나는 경우, 폭발과 함께 '플래시 오버'라고 부르는 매우 빠른 연소가 나타납니다. KT 아현지사 화재는 달랐습니다. 자욱한 연기가 먼저 피어올랐고, 불길은 10시간여 만에 겨우 잡혔습니다. 인입 통신구의 구조상 밖에서 가스가 들어오기도 쉽지 않습니다.

④유·무선 통신 케이블에서의 발화
광케이블은 전기 신호를 '광선 신호'로 바꿔 유리 섬유로 전달합니다. 전류가 흘러도 발열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게 특징입니다. 동 케이블은 미세 전류가 흘러 접속점에서 발열이 나타날 순 있지만, 전류의 강도가 강하지 않습니다. 또 지금까지 동 케이블로 인한 화재 사고가 보고되지 않은 것도 가능성을 더욱 떨어뜨렸습니다. 소방 당국은 케이블 때문에 불이 시작됐다면 화재 현상이 나타나기 전 KT 측이 미리 알았을 거라고 봤습니다.

⑤형광등이나 관련 배선에서의 발화
인입 통신구 천장에 달린 형광등은 들어갈 때 켜고, 나갈 때 끄는 시스템입니다. 평소에는 '꺼짐' 상태로 운영됩니다. 비록 통신구 안이 심하게 불에 타 평소 형태를 식별하긴 어려웠지만, 소방 당국은 형광등에서의 발화 가능성도 적다고 봤습니다. 만약 형광등에서 불이 시작돼 통신 케이블로 옮겨붙은 거라면, 내부 구조상 '오른쪽' 케이블에서 장애 신호가 먼저 감지됐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왼쪽' 케이블이 먼저 이상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또 형광등에서 바로 케이블로 불이 옮겨붙었다면, 화재 감지기 작동 시간과 통신 케이블 장애 시간 사이가 매우 짧아야 하는데 실제로 약 3~4분가량 비교적 크게 나타난 점도 해당 가능성을 기각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⑥환풍기 본체에서의 발화 가능성
철제 소재로 된 환풍기는 현장에 잔해가 남아 있었습니다. 불에 탄 환풍기를 분해해 관찰한 결과, 소방본부는 이 역시 화재 원인에서 제외했습니다. 전기 제품에서 불이 날 때는 전기를 차단해주는 절연 장치가 끊어지거나 손상된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결국 환풍기 제어반뿐!

결국, 남은 가설은 이 환풍기를 작동시키는 제어반뿐이었습니다. 소방본부는 이 제어반에서 불이 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봤습니다. 제어반 내부에 각종 부품과 전원 장치가 많고, 통상 쓰이는 220V(볼트) 대신 380V(볼트) 전압을 사용해 상대적으로 화재에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제어반 본체는 철제지만, 덮개는 불에 잘 타는 플라스틱으로 된 점도 화재를 키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화재 진행 방향과 연소 상태 등, 4차례 현장 감식에서 발견한 여러 정황도 환풍기 제어반 내부에서 불길이 처음 시작됐다고 가리켰습니다.

"KT도 화재 위험성 알고 있었다"

소방본부는 이어 KT 측도 평소 환풍기 제어반의 화재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규모가 큰 주 통신구에서는 환풍기 제어반에 온도 감지기와 자동 확산 소화기가 설치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입 통신구는 소방법상 길이 500m 미만의 '소규모 통신구'로 분류돼, 각종 법정 설비를 설치할 의무가 없어 자동 확산 소화기 등 개별 소방시설이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내부 온도가 섭씨 40도를 넘으면 이상 신호를 보내는 온도 감지기 역시, 인입 통신구 환풍기 제어반에는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온도 감지기는 사실 소방법상 설치 의무가 없는 '자체 설비'이긴 합니다. 하지만 KT는 '고속도로'인 주 통신구 환풍기 제어반에는 온도 감지기와 자동 확산 소화기를 모두 설치해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골목길'이라는 이유로 인입 통신구 관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건 아닌지 의심되는 대목입니다.


■'골목길도 큰길처럼 철저히 관리해야!'

소방본부는 보고서 끝에 "인입 통신구에도 주 통신구처럼 온도 감지기 등을 설치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소화 설비를 설치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관리 부서를 일원화하고, 주 통신구의 전문적인 관리 시스템을 인입 통신구 등으로 확대해야만 신속한 화재 대응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아현지사 안 국내 통신구와 인입 통신구, 주 통신구는 모두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나뭇가지 끝에 불이 나도 기둥으로 옮겨붙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시설이라고, 법정 설비 의무가 없다고 관리를 소홀히 했다가는 어떤 참사가 발생하는지 우리는 모두 지난해 11월 뼈저리게 느낀 바 있습니다.

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취재가 시작되자, KT 측은 간단한 입장을 내놨습니다. 소방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대응체계를 원점에서 다시 점검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요. 길게는 일주일까지 전화나 인터넷은 물론이고 은행과 경찰, 응급실 전화에 군 내부 통신망까지 마비됐던 재난 수준의 통신 대란 뒤에 KT가 과연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 지켜볼 일입니다.

강푸른 기자 (strongbl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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