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남편을 주인님이라 불러"..日여성 울린 '82년생 김지영'

윤설영 입력 2019.02.25. 01:00 수정 2019.02.25.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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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설영의 일본속으로]
2030 여성 다룬 국내 밀리언셀러
번역본 출간 2개월새 8만부 돌풍
성희롱·경력단절 등 어려움 공감
"같은 경험자 .. 부당함 깨달았다"

“일본에선 남편을 주인님(ご主人)이라고 부른다고요? 지금도 그렇다고요?”

지난 19일 도쿄 신주쿠(新宿)의 대형서점인 기노쿠니야에서 열린 대담회.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가 “머릿 속이 하얘져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지난 19일 도쿄 신주쿠의 대형서점 키노쿠니야에서 열린 조남주 작가의 대담회. 번역가인 사이토 마리코(왼쪽에서 두번째부터), 조남주 작가, 소설가인 가와가미 미에코가 참석했다. 윤설영 특파원

함께 했던 여성 작가 가와가미 미에코(川上未映子)는 “주인님이라는 호칭 대신 남편의 이름을 부르자는 칼럼을 썼다가 많은 공격을 받았다”는 일화를 털어놓았다. 가와가미는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전통도 아니고 단지 여성과 남성을 주종관계로 보는 것인데, 이런 호칭들이 일본 사회 의식을 콘트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대담회는『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도 반향을 일으키자, 출판사 측에서 독자 400명을 초청해 마련한 이벤트였다. 유료행사였는데도 좌석은 금새 동났다. NHK 등 미디어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해 뜨거운 열기를 반영했다. 참석자들은 주로 20,30대의 여성들이었지만 남성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은 2월 15일까지 7쇄 약 8만부가 발행됐다. 한국소설이 출간 2개월만에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례적이다. 출판사인 치쿠마쇼보도 예상밖이라는 반응이다. 담당 편집자는 “한국에서 밀리언셀러가 됐다고 해서 일본에서도 잘 될거라고 예상하긴 어려웠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도쿄 신주쿠의 대형서점 키노쿠니야에 마련된 한국문학 특별코너. 윤설영 특파원

지난 18일부턴 도쿄 시내 중심부를 순환하는 야마노테선 구간 전철에 광고도 시작했다. 일주일에 약 2800만명이 이용하는 야마노테선 광고는 ‘베스트셀러만의 특권’이다. 도서관에서 『82년생 김지영』을 빌리려면 순번을 70번 넘게 기다려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 소설 속 김지영이 현실의 ‘82년생 사토 유코(당시 가장 흔했던 여자아이 이름)’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선배 세대들과 분명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여전히 유교 문화와 가부장 중심의 질서 속에서 차별받거나 억눌려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를 낳은 후 풀타임 직장에서 일하는게 너무 힘들어서 파트타임으로 직장을 옮겼다. 당시엔 가족을 위해 올바른 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가 다시 생각나 눈물이 났다”, “나의 할아버지도 남동생만 예뻐했다. 차별인지 몰랐는데, 차별이 바로 여기 있었다”,“김지영의 경험은 여성의 인생에 있어서 ‘표준 사양’이고, 나도 같은 경험자다”등의 반응은 김지영과 사토 유코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안에서의 차별, 면접 도중 성희롱 경험, 임신·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등 “아루아루”(맞아맞아)라며 ‘『82년생 김지영』을 찾아보게 되는 이유다.

일본은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가 발표한 ‘2018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서 149개 국가 중 110번째로 젠더 격차 지수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은 115번째로 더 낮았지만 실제 일본 여성들이 피부로 느끼는 차별 감도는 더 심각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지난해엔 재무성 차관이 여성 기자에게 “가슴을 만져도 되겠냐”는 등의 성희롱 발언을 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경제부총리는 처벌은커녕 “세상에 성희롱이라는 죄명은 없다”며 이를 옹호하는 발언을 기자들 앞에서 했다.

한 여성 시의원은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의회에 등원했다가 남성 의원들의 항의를 받고 쫒겨나는가 하면, 도쿄 의대 등이 수년간 의도적으로 여자 수험생의 점수를 깎아 남자 합격생의 비율을 조정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일본만은 미투(Me Too) 운동의 무풍지대였다. 되도록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 풍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사회분위기에 묻혀 여성들의 목소리도 설 곳을 찾지 못했다.

지난 19일 도쿄 신주쿠의 대형서점 키노쿠니야에서 열린 조남주 작가의 대담회 후 한 독자가 NHK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82년생 김지영』 일본어판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출간됐다. 일본 독자들 사이에선 특히 책을 읽고 “울었다”는 반응이 많다. 자신들이 체험한 부당한 일들을 소설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고 한다. 『82년생 김지영』이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한 독자는 “어릴 때부터 ‘여자임을 명심해라’ 등등에 익숙해진 내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센서조차 없었다. 이 책을 읽고 울어버린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울었다"는 반응은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집회’ 등 분노를 행동으로 옮겼던 한국 독자들과 확실히 다른 표현방식이다.

대담회에서 만난 독자 아사이 이쿠코는 “일본에선 여자는 남자의 한 발 뒤에 서거나, 남자를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는 걸 미덕으로 받아들여왔다. 김지영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일이 마치 나의 일처럼 느껴지는게 이 소설의 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도쿄 신주쿠의 대형서점 키노쿠니야에서 열린 조남주 작가의 대담회 후 독자들이 '82년생 김지영'을 구매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82년생 김지영』이 갖는 힘에 대해 가와가미 작가는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전혀 불안하지 않는 점”이라고 말했다. 김지영이 겪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올바름’, ‘정의’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얘기다. 가와가미 작가는 “일본 작가들은 스스로 정의 자체를 의심할 권리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작가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출간된지 겨우 2개월 밖에 안됐지만 ‘김지영’이 ‘사토 유코’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시작한 건 확실한 듯 하다. "김지영이 소설 속에서 사회변화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독자 스스로 '부당함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얘기하면서 작품이 완성됐다고 느꼈다"는 조남주 작가의 말처럼, 일본에서도 '사토 유코'들만의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중이다.

■ 번역가 사이토 "스트라이크 존이 넓은 소설...무한한 가능성"

『82년생 김지영』의 일본어판을 번역한 사이토 마리코(斎藤眞理子)는 박민규의 ‘카스테라’, ‘핑퐁’ 등 다수의 한국문학 작품을 번역했다. 사이토는 ‘『82년생 김지영』을 “독자가 자기 자신을 투영하기 쉬운, 스트라이크 존이 넓은 소설”이라고 말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소감이 어떤가.

=놀라면서도 기쁘다. 2개월 사이 이렇게 큰 반응은 예상 밖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무한의 가능성을 느낀다. 더불어 한국 문학 작품이 한 층 더 다양하게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번역가로서 소설에서 공감했던 부분이 있다면.

=김지영보다 김지영의 엄마와 나이가 비슷하다. 엄마의 심정에 귀를 기울여도 굉장히 공감이 되는 책이다. 나도 20대의 자녀가 있는데, 내가 20대일 때와는 세상이 너무 달라서 돕고싶어도 내 경험으로는 도울 수가 없었다. 김지영의 엄마도 그렇다. 나름대로 딸을 도왔지만 일과 양육은 더 도울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은 똑같았다.

-이 소설을 계기로 일본 여성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으면 바람이 있나.

=미투 운동은 헐리우드에서나 일어나는 자신과는 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82년생 김지영’을 읽고서 나와도 상관이 있는 사회문제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반응이 많다. 이 책의 큰 힘이 바로 이것이다. 일본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경험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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