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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국 사회의 '검은 코끼리'

김수진 | 고려대 BK21플러스BEF경제사업팀 연구교수 입력 2019. 02. 2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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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얼마 전 필리핀으로 불법 수출된 쓰레기가 한국으로 반환된 적이 있다. 수출된 폐플라스틱 더미에 생활쓰레기가 무분별하게 섞여 있었고, 그 결과 국제적 망신과 불신을 불러왔다. 일단 생산이나 소비만 하고 보자는 식의 경제방식이 환경을 파괴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로막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원자력발전 분야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1978년 고리 1호기를 필두로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할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월성의 건식저장소는 올해 안으로 저장소 추가 건설을 시작하지 않으면 발전소 운영 자체를 멈춰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고리, 영광, 울진의 경수로 발전소에서는 사용후핵연료를 수조에 ‘임시’ 저장하고 있다. 그런데 ‘임시’라는 말은 사용후핵연료 문제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여부와 관련한 공식적인 정책이나 합의가 부재한 상태에서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이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고, 이런 이유로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대한 법 규정도 모호하기 그지없다. ‘중간 저장’의 정의만 있을 뿐 현재의 ‘임시’ 저장 상태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이것은 단지 법 규정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사용후핵연료 관리의 안전 문제와 직결된다.

독일은 원자력발전소 부지에 있는 사용후핵연료 저장소에 대형 여객기의 충돌에도 끄떡없는 중간저장소에 준하는 안전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사용후핵연료 ‘임시’ 저장소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물리적 방호를 갖추고 있지 않다. 놀라운 사실은, 사용후핵연료의 중간저장소나 최종 처분장 부지를 이야기할 때면 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정작 발전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열량이 가장 높은 상태인 사용후핵연료를 어떠한 방호설비도 갖추지 않은 수조(경수로 원전의 경우)에 그냥 계속 저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용후핵연료가 발전소 부지의 ‘임시’ 저장소에서 포화되고 있다는 사실만 부각되어 현재 사용후핵연료의 안전 문제는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어느 학자는 지진과 쓰나미 등 위험이 충분히 예견됐지만 무시됐다는 의미에서 ‘검은 코끼리’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영어에서 ‘방 안에 있는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는 방 안을 코끼리가 돌아다니지만 불편한 사실을 모두 무시한다는 뜻이고, ‘검은 백조(Black Swan)’는 발생 확률이 매우 낮은 희귀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이 두 용어를 결합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검은 코끼리’로 표현한 것이다.

사용후핵연료의 ‘임시’ 저장 상태야말로 한국사회의 ‘검은 코끼리’다. 지금까지 사고가 나지 않았다고 해서 ‘임시’ 저장 상태가 결코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원자력학회는 세 차례에 걸쳐 원자력발전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원자력발전 유지·확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 생산으로 발생하는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원자력발전소 확대를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가? 국민에게 정말 책임 있는 자세는 전략적 의도에 기반한 원자력발전 이용 조사가 아니라 사용후핵연료 문제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대안 제시와 의견수렴이어야 하지 않을까?

김수진 | 고려대 BK21플러스BEF경제사업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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