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전쟁 찬양하고 제자 팔았던 대가"..공적 추앙받는 '친일 변절자'

민수미, 지영의 2019. 2. 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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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주년③] 민족 저버리고 일본 찬양..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위용 떨쳐

1919년 3월1일. 대한 독립을 염원하는 200만 조선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날 현장에서 만세를 외쳤던 이들이 모두 같은 운명을 맞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감옥에서 고문 끝에 생을 마감했고, 어떤 이는 살아남아 조국 독립에 헌신했다. 대다수가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다. 반면,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이들도 있었다. 독립을 외치다 일제의 부역자로 돌아선 '변절자'들이다. 

“우리의 아들과 동생들을 나라에 바치고 나서는, 인제야말로 우리도 정말 황민된 의무를 완전히 다할 수 있어 감격스럽다” - <방송지우> 1943년 12월호에 실린 박인덕의 글 中 -

서울 노원구 월계동 소재 인덕대학교에는 박인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박씨는 인덕대 설립자인 동시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 인사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조선 청년들을 바칠 수 있어 감격스럽다’던 박씨. 그는 한때 독립운동가였다. 박씨는 이화학당 교사로서 3.1운동을 지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5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감옥에서 유관순을 만났던 일을 세상에 알렸다. 또 지난 1926년 유학길에 오른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황애덕 등과 함께 해외에 일제강점의 현실을 알리는 데 힘쓰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침략전쟁을 벌이던 시기, 박씨는 돌연 조국을 등졌다. 창씨개명을 하고 전시동원 체제에 적극 동조했다. 박씨의 변절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학계에서는 그의 변절이 '그저 운신의 폭을 넓혀준 정도'라고 추측할 뿐이다. 박씨는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친일 단체 소속으로 각종 강연회와 연설회 등에 나서 조선 여성의 전쟁 협력 필요성을 역설하고, 학도병 지원을 촉구하는 선전에 힘썼다. 채권가두유격대 종로대에 참여해 전시채권을 팔기도 했다.

박씨에게 반성은 없었다. 해방 이후에는 반공‧반탁 연사로 이름을 날렸다. 미군 소속 문화 사절로 외국에 나가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교육재단을 설립하고, 교육자 지위에 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에는 ‘국민교육 헌장 이념 구현’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박씨의 동상이 대학의 교정에 버젓이 서 있을 수 있는 배경이다.

변절했음에도 친일행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이들은 박씨만이 아니다. 한때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으로 평가가 엇갈리거나, 해당 경력을 이용해 슬그머니 친일 행적을 감춘 이들도 많다. 사회 곳곳에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0년 말 부산 기장군청은 여성 정치인 박순천 생가 복원 및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시민단체는 반발했다. 친일파인 박씨의 행적을 기념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후 기장군청은 사업계획을 소리소문없이 접었다. 

박씨 기념사업이 추진된 이유는,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던 그의 이력 때문이다. 박씨는 지난 1950년 제2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해 정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5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당과 민중당의 여성 당수를 맡기도 했다. 사망한 이후에는 4.19혁명 유공자인 남편 변희용의 배우자 자격으로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4.19 국립묘지에 합장됐다.

박씨도 한때는 독립운동가였다. 경남 창원 의신여학교 교사였던 박씨는 마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그가 돌연 일제 찬양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시동원 체제에 협조하자는 시국논문을 내고,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에서 지도요원으로 일했다. 또 경성가정여숙 부교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1943년 3월, 학생들에게 일본의 전쟁에 도움을 줘야 한다고 설득해 제자 1명을 근로정신대로 보내기도 했다. 

활발한 친일 활동을 했음에도 매년 업적이 추앙되는 문인도 있다. 팔봉 김기진이다. 그는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조직된 문예운동 단체 ‘카프(KAPF)’의 주축이었다. 김씨는 사회주의 계급문학으로 일제강점에 저항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창시절에는 3.1운동에 참여,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구류됐던 이력도 있다. 김씨는 일제의 카프 활동 관련자 검열 과정에서 잡혀가 옥살이를 한 뒤 변절을 택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들어간 김씨는 붓끝으로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밀어냈다. 그는 시와 수필, 시조, 평론, 강연문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화려한 친일 논조를 선보였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지난 1943년 8월1일)’와 ‘나도 가겠습니다(매일신보, 같은 해 11월6일)’ 등은 그의 대표적인 친일 저술작이다. 작품 속에서 김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조선인들이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김씨는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같은 행보를 사뭇 다르게 기억했다. 자신은 “친일 열성 문인들의 비난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서 조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생각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해방 이후 전선문학을 쓰며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또 여러 문화예술 단체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문화훈장도 받았다. 지난 1990년부터는 김씨를 기리는 ‘팔봉 비평문학상’이 제정돼 매년 시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최 측은 김씨의 문학적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입장이다.

친일인사 기념 행위는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공공영역에서 친일 인사에 대한 기념사업 등은 대단히 부적절하다”며 “친일 행위에 대한 명시 없이 일방적인 미화 작업을 하는 것은 역사 왜곡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민수미, 지영의 기자 ysyu1015@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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