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프레빈 별세, 영화음악·재즈·클래식 경계 넘나든 음악계 거장

유정인 기자 2019. 3. 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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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음악계 거장’ 앙드레 프레빈이 지난 1984년 7월 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를 지휘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세계적인 지휘자 겸 작곡가 앙드레 프레빈이 2월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작곡가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 할리우드 영화음악부터 클래식, 재즈까지 경계를 초월하는 음악세계를 펼쳐 온 거장이다.

프레빈은 1929년 독일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환경으로 일찍부터 클래식 음악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심해지면서 9세 되던 해 독일을 떠났다. 프레빈 가족은 이후 프랑스 파리에 머물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이주했다. 프레빈은 10대 후반부터 LA일대의 영화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사실상 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음악적 재능은 일찍부터 발현됐다. 시작은 영화계였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MGM 등 당시 할리우드 유명 제작사들의 영화음악 작곡·편곡을 맡았다. 29세이던 1958년, 영화 ‘지지’로 첫 아카데미 음악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포기와 베스’(1959년), ‘당신에게 오늘 밤을’(1963년)과 오드리 헵번 주연의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4차례 수상했다. 그래미상과도 1960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로 재즈 연주 부문에서 수상하는 등 수 차례 인연을 맺었다.

30대 후반부터 클래식 음악계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할리우드를 떠나 1967년 휴스턴 심포니 음악감독에 취임했고,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LSO), 휴스턴 심포니, LA필하모닉, 런던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악단의 지휘자를 맡았다.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18세였던 1970년, 프레빈이 지휘하는 LSO와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협연한 이후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로 부상한 인연이 있다.

프레빈의 음악 여정은 오페라와 재즈로 나아갔다. 1988년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토대로 한 오페라를 작곡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극장 무대에 올렸다. 1995년엔 소프라노 실비아 맥네어와 함께 뮤지컬 ‘쇼 보트’의 음악과 뮤지컬 작곡가 제롬 컨의 곡들을 재즈로 재해석한 음반들을 내놨다.

음악 인생 뿐 아니라 사생활 역시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평생 5번 결혼했다. 세번째 아내인 미국 배우 미아 패로와 사이에 3명의 친자녀를 두고 3명의 자녀를 입양했다. 입양한 자녀 중 한 명이 한국에서 입양한 딸 순이 프레빈이다. 순이 프레빈은 이후 어머니 미아 패로의 남자친구인 영화감독 우디 앨런과 결혼했다.

패로는 프레빈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이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아침에 다시 만나요, 사랑하는 친구. 장엄한 교향곡들 가운데 잠들기를”이라고 추모 글을 올렸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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