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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너도 녹음? 나도 녹음!.. '녹투'가 일상이 됐다

김아사 기자 입력 2019. 03. 0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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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공포증 커지는 갈등
일러스트= 김의균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신모(33)씨는 최근 학부모와 몇 차례 얼굴을 붉혔다. 아이들 물품을 정리하다가 몇몇 아이 가방에서 소형 녹음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당황했어요. 아동 학대 뉴스가 많으니까 학부모들 불안한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사람을 이렇게까지 못 믿나 싶기도 하고." 이후 신씨는 일상생활에서도 누군가 내 얘기를 듣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위축되는 일이 많아졌다. 눈에 익지 않은 물건이라도 있으면 꼭 살피거나 치우는 버릇도 생겼다.

최근 몇 년 새 학부모 사이에서 소형 녹음기는 큰 인기를 끌었다. 주부들이 방문하는 맘 카페에는 목걸이형 녹음기를 아이 목에 채우거나 아이 옷이나 가방을 찢어 그 안에 녹음기를 넣고 꿰매면 감쪽같다는 식의 글이 공유됐다. 성능이 12시간 이상 되는 데다 CCTV 등과 비교해 확인이 편리하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4세 아이를 둔 한 부모는 교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폭언이나 학대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교실 앞에 서 있고 싶을 정도로 걱정이 많아요. 괜스레 의심하는 것보다 한 번쯤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녹음 생각 안 해본 엄마들 없을 거예요."

녹음 때문에 갈등이 늘고 있다. 버튼 하나로 상대의 대화를 손쉽게 녹음하는 일이 가능해진 사회가 만든 병리 현상이다. 상대가 모르는 사이 녹음이 진행되고 유출되는 일이 늘어나면서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의도치 않게 사생활을 노출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나 손석희 JTBC 대표이사도 이에 해당한다.

매사에 녹음하거나 당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이로 인한 스트레스나 공포심을 보이는 '레코포비아(recording+ phobia)', 녹음을 들이밀며 나도 당했다고 하는 '녹투'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범위나 대상이 광범위해 하느냐 당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 상대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하는 녹음이 일상처럼 돼버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린이집부터 경찰서까지

만연한 녹음 탓에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대기업 신입 사원인 장모씨는 한 임원과 업무 통화 중 뜻밖의 질문을 들었다. '휴대전화 기종이 뭔가요. 갤럭시예요, 아이폰이에요?' 별걸 다 묻는다는 생각도 잠깐. 갤럭시를 쓴다고 답하자 뚝, 전화가 끊겼다. 실수로 끊어졌나 싶어 전화를 다시 걸려는데 카카오톡 메신저의 통화 기능인 '보이스톡'을 통해 연락이 왔다. 왜 일반 전화로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건 녹음도 되고, 괜히 불편한 일 만들지 말자는 의미'라는 식의 답이 돌아왔다. 보이스톡은 통화가 데이터로 이뤄지기 때문에 기록이 남지 않고 녹음도 어렵다. 동료에게서 회사 내 몇몇 상사가 보이스톡을 이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정이나 기업, 학교뿐 아니라 은행이나 병원, 공공기관 심지어 경찰 조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이런 경우엔 '녹투'를 무기 삼은 갈등이 나타난다. 경찰관을 향해 '당신 말투 왜 이래' 하며 '나도 녹음하고 있는 거 몰라'라는 식의 말이 수도 없이 나온다는 것. 현장에서 체포됐는데도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고압적 수사를 받았다며 소셜미디어에 관련 내용을 올리겠다거나 청와대 게시판에 국민 청원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게 일선 경찰관들 이야기다. 은근슬쩍 휴대전화를 옆에 두거나 소형 녹음기로 몰래 녹음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놓고 보라는 식도 많다. '녹음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무언의 경고 메시지다.

배우자의 불륜을 의심해 대화를 엿듣는 경우는 레코포비아의 한 사례다. 집 안이나 차 안에 녹음 장치를 설치하거나 배우자의 가방이나 옷에 소형 녹음기를 넣어둔다. 일부는 스마트폰을 도청 장치로 만들어 통화나 문자 내용을 확인해주는 '스파이앱'을 이용하기도 한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펜이나 안경 모형 녹음기를 사 가는 이 중 절반은 불륜이 이유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이런 식으로 증거를 수집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소송으로 이어져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손해를 배상할 수도 있다.

최근엔 볼펜이나 안경 등 생활 제품 모양을 띤 녹음기가 인기다. 녹음을 알아채기 힘들기 때문이다. USB 단자가 있어 컴퓨터에 꽂아 파일을 옮기거나 충전할 수 있다. / 연합뉴스

타인 간 대화 녹음은 불법

녹음 공화국이란 오명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녹음에 관대한 법이 첫손에 꼽힌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청취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다. 이는 곧 타인 간이 아닌 자신이 당사자가 된 대화는 녹음해도 불법이 아니란 뜻이다. 자신의 통화를 녹음하거나,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상사와 나눈 대화를 몰래 녹음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법원은 형사처벌은 받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알리지 않는 '비밀 녹음'은 불법행위라는 의견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민사상 손해배상을 책임을 지는 경우도 많지 않다. 비밀로 녹음했다 해도 정당한 목적이나 이익이 있고 사회 윤리나 통념에 비춰 용인될 수 있다면 정당성이 인정되는데, 무엇이 정당한 목적인지 등도 명확한 이론이나 판례가 정립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법무 법인 민주의 서정욱 변호사는 "국내는 상대적으로 사생활 보호에 대한 인식이 낮고 녹음과 관련한 공론화 과정도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세계적으로 높은 한국의 사기 범죄 발생 비율에서 이유를 찾는 이들도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사기 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 매일 600여 건 사기가 발생해 '사기 공화국'이란 오명이 있을 정도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계약을 서면으로 작성하지 않는 것 등 사기에 취약한 문화가 자리 잡은 탓에 녹음 등이 보조제 역할을 해 온 부분도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우리가 녹음에 관대하다는 것은 드러난다. 프랑스와 독일은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녹음은 불법으로 규정한다.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캘리포니아 등 11개 주에서 통화 상대가 동의하지 않은 녹음을 불법으로 본다. 일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대방 동의 없이 녹음은 가능하지만, 이를 타인에게 전달해선 안 된다. 애플이 아이폰에 통화 녹음 기능을 넣지 않은 것도 이런 법제를 의식한 것이다.

사내 녹음 탓 TV 틀어놓는 상사도

기업 등에선 녹음 문제로 직원 간 다툼이 발생하는 등 '사내 녹음'이 문제가 되자 이를 아예 금지하는 경우도 생겼다. 소셜커머스 업체 쿠팡은 2017년부터 이런 식의 사내 녹음을 금지하는 내용의 지침을 직원들에게 내리기도 했다.

최근 용산 전자상가 등에선 녹음기만큼 많이 찾는 게 녹음 차단기다. 포털에 '녹음 방지'나 '차단'을 치면 관련 물품이나 노하우가 검색되기도 한다. 정부 기관에서 근무하는 박모씨는 아예 TV를 틀어놓는다. 낮은 TV 소리가 방해 주파수 역할을 해 녹음이나 도청을 막는 데 도움을 준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통화 기록이 남지 않고 녹음이 어려운 카카오톡 보이스톡을 전화 대신 사용하는 이가 늘어난 것도 비슷한 이유다. 불법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오해를 주고받지 말자는 취지라고 한다.

국회에선 통화 시 녹음 등을 알리게 하자는 입법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2017년 자유한국당 김광림 의원은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경우 그 사실을 통화 상대방에게 고지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일명 '통화 녹음 알림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사회 약자들의 방어 수단을 봉쇄한다는 지적이 일며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녹음 공포는 사회 구성원 간 신뢰가 부족한 데서 오는 문제이기도 하다"며 "법이 아닌 의식이나 교양으로 해결하려는 노력과 함께 사생활 침해 문제 등을 고려한 사회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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