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누군가를 정확하게 미워하는 것의 어려움

입력 2019.03.03. 09:36 수정 2019.03.0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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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2
① 사랑과 미움

오롯한 이해와 공감 속에서
자기의 편견을 투사하지 않으면서
잘 안다고 스스로 기만하지 않으며
상대를 정확하게 미워할 수 있나?
'논어'의 주요 주제, 정교한 미움
인자는 모든 이 좋아하는 사람 아닌
미워할 사람을 미워할 줄 아는 사람
공정성 인식과 높은 공감능력 필요
<논어>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무엇을 어떻게 미워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하철의 쩍벌남에 대해 공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논어>에 딱 한 번 공자가 직접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원양이라는 이가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자, 공자는 그에게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놈이다”라고 일갈하며,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마치 정확한 미움을 실험하는 것처럼.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나. 허기질 때는 살아 있는 이웃보다 죽어 있는 소고기를 더 사랑하는 우리는, 누군가를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나. 상대에 대한 오롯한 이해와 공감 속에서, 동시에 자기의 역량을 과신하거나 불신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만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상대를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나. 지하철에서 마주친 미인을 바라보다가 그만 같은 역에서 따라 내리고 만다. 아. 같은 지하철역에 내린 걸 보니, 우리는 천생연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곧 자신은 다음 역에 내려야 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고 만다. 기만 없이 정확히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힘들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데 너무 익숙하다. 상대의 정확한 모습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상을 사랑한 대가는 혹독하다. 사랑의 파국은 대개 상대와 자신에 대해서 부정확했던 사랑의 파국이다.

시인 장승리는 ‘말’이라는 시에서 부정확한 사랑의 고통에 대해 노래한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봐/ 안길까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사랑,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랑, 정확한 사랑이기에 알몸이 부끄럽지 않은 사랑. 이토록 어려운 과업을 누군가 해내겠다고 약속한다면, 목석같은 사람도 마음을 열지 않을까? 그런 약속을 해주는 사람이라면, 철 지난 개량한복을 입고 프러포즈를 해도 성공할 것만 같다.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 같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자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 서문에서 “…나는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썼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라고 말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실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정확히 사랑하는 일에 대한 언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파하지 않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원수에겐 합당한 갚음을

우리는 누군가를 제대로 미워할 수 있나.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도 법망을 빠져나가는 권력자보다 코앞에서 놓쳐버린 모기에 대해 더 분노하는 우리는, 누군가를 정확하게 미워할 수 있나. 상대에 대한 오롯한 이해와 공감 속에서, 동시에 자기의 편견을 투사하지 않으면서,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으면서,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마치 잘 아는 양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정확하게 미워할 수 있나. 넋을 잃고 바라보던 미인이 지하철에서 하차하자, 옆자리의 ‘쩍벌남’이 다리를 달달 떨면서 말한다. “진짜 예쁘던데. 나한테 눈길 한번 안 주더라. 망할 것.” 제정신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충족되지 않은 자존심 때문에, 막연히 키워오던 복수심 때문에, 근거 없이 남을 미워하기 서슴지 않는다. 갈등에 휘말리기 싫어서, 정작 마땅히 미워해야 할 목전의 상대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낮춘다. 미워해야 할 상대를 정확히 미워하지 않고, 잘 모르는 타자에게 막연한 복수심을 발산한 대가는 혹독하다. 미움의 파국은 대개 상대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 속에서 자신의 막연한 앙심을 투사했던 미움의 파국이다.

논어는 남녀 간의 정확한 사랑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공자는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 같지도 않다. 설령 믿었다고 해도, 그걸 논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떤 집요함이 느껴질 정도로 그 주제는 논어 텍스트에서 배제되어 있다. 새롭다는 이유 하나로 현재의 애인을 저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서는 남자를 비난하는 시를 넌지시 인용한 적이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亦祇以異) 그렇다고 해서 공자가 남녀 간의 육욕에 대해 몰랐던 사람은 아니다. 논어에는 색(色)에 대한 논의가 종종 등장하며, 구체적으로는 남자(南子)에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이었던 남자는 음란하다는 평판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그 평판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위나라 세자 괴외(??)가 음란함을 이유로 모친인 남자를 죽이려 했을 정도이다. 공자가 바로 이 남자와 만남을 가진 일이 있었다. 그러자 제자 자로(子路)는 공자가 남자와 만났다는 사실에 대해 대놓고 불쾌해한다.(子見南子, 子路不說.) 그러자 공자는 자신의 행동을 격렬히 해명한다. “예에 어긋나는 일이 있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天厭之, 天厭之.) 뭔가 찔린 구석이라도 있었나. 갑자기 하늘까지 들먹여 가며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저토록 강변하다니.

로맨틱한 사랑에 대해 논하기를 꺼린 공자가 더 공개적으로 관심을 두었던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호오(好惡)의 문제, 그중에서도 특히 정확한 미움의 문제였다. 논어에 묘사된 공자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판하는 일에 대해 사뭇 당당하다. 실로 논어에는 많은 이들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실려 있다. 논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어떻게 모든 이를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미워할 것인가, 라는 정교한 미움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자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군자(君子), 인인(仁人), 혹은 인자(仁者)와 같은 용어를 써서 표현했다. 옛날에도 그런 훌륭한 사람은 누군가를 대놓고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통념이 팽배했나 보다. 제자 자공은 “군자도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있나요?”(君子亦有惡乎)라고 스승에게 묻는다. 이에 대해 공자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당연하지! “미워하는 일이 있다.”(有惡) 누군가 공자에게 “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면 어떨까요?”라고 묻자, 공자는 되묻는다. “그럼 덕은 무엇으로 갚으려고?”(何以報德) 공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못된 사람들에게 무조건 잘해주거나 화해를 도모하려 하지 말라. 원수에게는 잘해줄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갚음을 해주어야 한다. 공자의 이상형은 이토록 무골호인(無骨好人)과 거리가 멀다. 그는 무골호인이 아니라 유골호인(有骨好人)이다.

무골호인과 아첨가는 지옥으로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유골호인은 드물고 무골호인과 포퓰리스트가 넘쳐난다. 가장 흔한 무골호인은 정치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선거 때가 되면, 저는 이 지역에 뼈를 묻겠습니다! 라고 외치며 한 표를 호소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패배하고 나면 또 다른 곳을 찾아 외친다. 저는 다름 아닌 요 지역에 뼈를 묻겠습니다! 그렇게 뼈를 자주 묻고서, 기어이 그는 뼈 없는 순살 정치인이 되고 만다. 어디 정치인뿐이랴. 권력자하고 충돌하지 않으려고 달콤한 말만 늘어놓는 아첨가, 비판을 주고받기 싫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봉합충,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늘 중립만 강조하는 중립충. 자기편이면 무조건 싸고돌며 덕담만 일삼는 덕담충. 염라대왕은 이들을 위해 가장 잘 타는 지옥불을 지피고, 사약보다 뜨거운 물을 끓이고 있을 것이다.

논어에 따르면, 모든 이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이들이 좋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나쁜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 낫다.(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제대로 된 사람은 나쁜 사람을 미워할 뿐 아니라, 나쁜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공자는 어설픈 평화주의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저 사람처럼 모나게 살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 사람처럼 모나게 살지 마라”에서 “저 사람”을 맡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공자이다. 공자에 따르면, 비타협적으로 살 때야 비로소 악한 일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다.(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그러나 단순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확히 좋아하고 미워해야 한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말한다. 오직 인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고.(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공자는 인한 사람은 호오(好惡)와 무관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좋아만 할 것라는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인한 사람은 좋아하는 일의 전문가인 만큼이나 미워하는 일의 전문가이다. 공안국(孔安國)이나 주희(朱熹)와 같은 후대 논어 주석가들이 강조했듯이, 누군가를 정확히 좋아하고 미워하려면, 공정성에 대한 명철한 인식과 더불어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성경>(왼쪽)에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복음 5장)라고 말하지만, <논어>(오른쪽)에 나타난 공자의 태도는 “원수를 미워하고 너희를 부당하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정벌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위키피디아

더 놀라운 것은, 공자는 결코 폭력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을 담았다고 이야기되는 텍스트들에서 합당한 정벌은 도덕적으로 늘 정당화되어 왔다. 즉 인한 사람은 단순히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필요 이상의 폭력은 행사하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전쟁마저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수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공동번역성서, 마태복음 5장)라고 말한 일은 유명하다. 공자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악한 자가 오른뺨을 치거든 그의 왼뺨을 쳐라. 속옷을 가지려 들거든 원수의 속옷을 벗겨버려라. 원수를 미워하고 너희를 부당하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정벌하라.”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안정복은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덕으로 원수를 갚고 원한으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데… 군주나 아버지의 원수를 두고 이런 식으로 가르친다면 정의를 해치는 바가 클 것이다.”(天主敎士, 以德報讐, 不以讐報讐… 若以君父之讐, 而以此爲敎, 則其害義大矣.)

그렇다면 지하철의 쩍벌남에 대해서 공자는 어떻게 했을까? 논어에서 딱 한번 공자가 직접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원양(原攘)이라는 이가 길가에 무식하게 틀어놓은 유행가처럼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자(夷俟), 공자는 그에게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놈이다”(是爲賊)라고 일갈하며,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以杖叩其脛) 마치 정확한 미움을 실험하는 것처럼.

김영민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저서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정밀 독해와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 ‘논어 에세이’ 시즌 1(2017.9.16~2018.3.17)에 이어, 시즌 2에서는 논어에 담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을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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