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판 '트로이의 목마'..네오나치 단체 장악한 흑인 운동가

입력 2019. 3. 3. 17:26 수정 2019. 3. 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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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민권운동가, 백인우월주의단체 대표로
법원에 "2017 샬러츠빌 폭력 처벌해달라"
극우 웹사이트는 홀로코스트 학습관으로

과거 수감중 KKK지도자 만나 '이상한 친교'
출소뒤 '위장'가입..대표 올라 조직해체 수순
전 대표는 뒤늦게 "속았다" 심야성명 내
WP "합법적 대표..기존조직 유지 불투명"
2017년 8월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백인 우월주의 극우단체들이 벌인 시위의 참가자들이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군 깃발과 독일 나치 깃발을 들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미국판 ‘트로이의 목마’인가. 미국의 극우 백인우월주의 단체가 민권운동가에게 대표직을 넘겨주면서 조직의 명운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됐다.

캘리포니아주의 흑인 민권운동가 제임스 스턴(54)이 미국 최대의 네오나치 단체인 국가사회주의운동에 ‘잠입’해 올해 초 새 대표직을 꿰찬 데 이어, 지난주 버지니아주 연방법원에 이 단체의 잘못을 인정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3일 보도했다. 스턴은 또 미국 전역에 지부를 거느린 이 단체의 누리집을 홀로코스트 교육장으로 바꿔놓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앞서 2017년 8월 국가사회주의운동은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백인 인종주의단체들이 벌인 폭력 시위 때 1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다치게 혐의로 피해자들로부터 소송을 당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 “한쪽에 나쁜 그룹이 있고, 다른 쪽에 아주 폭력적인 그룹이 있다”고 말해,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물타기를 시도한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지난 1월 이 단체의 제프 쇼프(46) 전 대표는 가입한 지 3년이 채 안된 흑인 민권운동가인 스턴에게 대표직을 넘겨주는 문서에 서명했으며, 쇼프의 측근들을 비롯한 핵심 활동가들은 지난주까지도 이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쇼프는 흑인인 스턴을 새 대표로 내세워 자신과 조직의 극단적 인종주의 이미지를 희석하고 법적 책임을 덜어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최대 네오나치 단체를 장악한 흑인민권운동가 제임스 스턴이 2012년 6월 미시시피주 잭슨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당시의 모습. 잭슨/AP 연합뉴스

스턴은 트로이의 목마를 연상케 하는 극적인 과정을 지난 1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공개했다.

2007년 스턴은 자신이 최고경영자였던 화장품 통신판매업체가 우편 사기 혐의에 휘말리면서 한때 수감됐다. 그는 감옥에서 백인 극우 비밀단체인 ‘큐클럭스클랜(KKK)’의 지도자 에드거 레이 킬런을 만나 “이상한 (친교)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 스턴은 침례교 목사이자 민권운동가였으며, 부계 쪽으로 에티오피아 유대인 혈통에 속했다. 한편 지난해 감옥에서 숨진 킬런은 1964년 흑인 인권운동가 3명을 살해한 ‘미시시피 버닝’ 사건의 주범으로 복역 중이었다.

스턴은 2011년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킬런과의 인연을 구실로 2016년에 국가사회주의운동에 ‘위장 가입’했다. 이 단체에서 스턴은 골수 인종주의자 쇼프에게 홀로코스트, 나치의 심볼인 스와스티카(갈고리 십자가), 백인우월주의, 나아가 이 단체의 미래 등에 정기적으로 토론하며 그의 마음을 바꿔보려 했다고 한다. 스턴의 설득은 실패했지만 뜻밖의 계기가 찾아왔다. 올해 초 쇼프 전 대표가 2017년 샬러츠빌 폭동으로 고소당한 것에 대한 법적 자문을 구했고, 스턴은 궁지에 몰린 쇼프에게 “새로운 출발”을 설득하며 조직의 대표 권한을 넘겨받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스턴은 <워싱턴 포스트>에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해냈다”며 “흑인으로서 네오나치 그룹을 장악했다. 내가 그들보다 더 영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자신의 인터넷 계정에 올린 동영상에서 “나는 미국에서 너무 오랫동안 누려선 안될 특권을 누려온 쿠 클럭스 클랜(KKK)와 국가사회주의운동, 두 단체를 뿌리 뽑으려 표적을 삼아왔다”고 밝혔다.

미국 네오나치 단체인 국가사회주의운동의 제프 쇼프 전 대표가 2011년 11월 캘리포니아주 포모나에서 이민자 반대 시위를 벌이면서 나치 경례를 하는 추종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걷고 있다. 잭슨/AP 연합뉴스

국가사회주의운동은 발칵 뒤집혔다. 올초까지 24년이나 이 단체의 지도자였던 쇼프는 스턴의 치밀한 계획이 공개된 지난 1일 밤 자정이 넘은 시각에 긴급성명을 내어 “내가 속았다”며 “스턴이 ‘샬러츠빌 소송’으로부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선 자기에게 대표직을 넘겨줘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털어놨다. 쇼프는 “국가사회주의운동의 지도부에 ‘젊은 피’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자신이 맡아온 이 단체의 ‘사령관직’을 핵심 활동가인 버트 콜루치 운영위원장이 맡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쇼프는 “(대표직 이양에 서명한) 종이 임명장이 우릴 멈추게 하진 못할 것”이라며, “스턴이 나를 속여 조직을 장악하고 해체하려 하는 배신 행위로부터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법적 소송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단체 대표 위임 무효소송으로 맞불을 놓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스턴이 합법적 대표가 된 이 단체가 어떻게 기존의 조직체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국가사회주의운동은 1974년 미국나치당(ANP)의 일부 당원들이 탈당해 결성한 단체로, “미국 최대의 활동적인 국가사회주의 단체”이자 “백인 시민권 단체”를 자처한다. 2011년 <뉴욕 타임스>는 이 단체가 미국 32개주에서 400여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으나 조직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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