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사이 '운전대' 노리는 아베..일본의 역사에서 그 '자격'을 묻다 [정리뉴스]

김찬호 기자 2019. 3. 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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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연합뉴스

“다음에는 내가 김정은 위원장과 마주 봐야 한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지난달 28일, 일본 아베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이 국내에 전해졌습니다.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이른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역할론’을 말한 것인데요. 때아닌 아베 총리의 발언에 국내에서는 ‘회담 결렬 소식에 일본만 좋았다’, ‘합의 실패의 배후에 아베가 있다’는 말들이 나옵니다.

사실, 처음 아베 총리 발언에 대한 국내외 주요 반응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곧 국가”라는 당시 아베 총리의 발언과 맞물리며 평가절하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미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일본이 북·미 사이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4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나간 아베 총리는 “북한에 대한 일본, 한국, 미국 간 긴밀한 연대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5일에는 일본 주요 언론들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북·미 정상회담 첫머리에 언급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놀랐다”며 아베 총리에 힘을 실었습니다. “아베 정부가 미국과의 연대를 북·일 정상 간 직접 대화로 연결하려 한다”는 해석도 담겼습니다.

지난 6일에는 아베 총리가 북·미 정상회담 전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안이한 양보는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는 내용이 보도됐습니다. 이날 아베 총리는 관저에서 북한 납치피해자 가족회 대표 등과 만나 재차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7일에는 NHK 등 주요 언론 모두 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하루를 빼놓지 않고 북한 문제에 대한 일본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북·일 관계를 외교사적으로 보면 아베 총리의 ‘일본 역할론’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특히, 북·미 관계의 악화는 일본이 개입할 여지를 주는 계기로 작동합니다. 아베 총리가 ‘일본 등판’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비판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궁급해집니다. 대체 이런 논리는 어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걸까요?

2월27일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

■일본의 ‘성공한’ 외교...그 중심에 있는 ‘아베’

‘일본 역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북·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는데요. 그런데 같은 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북한을 전격적으로 방문합니다. 그의 방북 목적은 ‘북·일 국교정상화’였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대 남기정 교수는 자신의 논문 ‘2002년 북일정상회담과 아베 신조의 부상’에서 “일본이 안고 있는 유일한 전후 처리 과제가 북일 국교정상화”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1990년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이 조선로동당과 함께 ‘국교정상화를 위한 3당 공동선언’을 채택한 후 양국 간에는 국교정상화를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바로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북일평화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총 4가지 항목인데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 사죄한다’는 조항을 빼면 전부 일본의 뜻대로 체결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 당시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납치 문제 시인과 사과를 받고 납치된 일본인 5명과 그 가족을 일본으로 데려왔습니다. 이는 “일본 외교사에서 보기 드문 성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하락세였던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율은 10% 포인트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공한’ 외교의 주역 중 한 명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당시 관방부장관으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총지휘했던 현재의 아베 총리입니다. 그는 ‘국내 지지율 하락 문제를 외교로 만회해 본 경험’을 한 것입니다. 최근 각종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한 아베 총리가 북한 문제를 위기의 돌파구로 선택할 가능성을 의심하는 이유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분쟁의 중재자로서 일본의 등판. 올해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제사회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북한이 일본과 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습니다. 하지만 2002년,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곤궁은 상상하지 못한 일을 현실로 만들기도 합니다.

과거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성과를 지켜본 한국 정부는 “북·일 대화는 김대중 대통령의 포괄적인 ‘햇볕정책’의 결실이다”는 공허한 말만 남겼습니다. 현재 ‘한반도 운전자론’을 주장하는 문재인 정부도 북·미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한국 정부가 그 역할에서 밀린다면 일본이 주도적으로 나설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제 아베 총리의 발언이 그냥 ‘의미 없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국가 단위의 ‘외교전쟁’에 응원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일본이 지금 이웃나라 분쟁의 중재자를 담당할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 누리꾼은 일본을 향해 “남의 나라일 신경 쓰지말고 너네나 잘하라”고 지적했는데요. 감정적인 발언 같지만 이 지적에는 나름 근거가 있습니다.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미군 후텐마 비행장이 이전할 헤노코 전경/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일본 오키나와현에서는 중요한 주민투표 결과가 공개됐습니다. 오키나와현에 주둔 중인 미군의 새 기지인 헤노코 기지 매립 공사의 ‘찬반’ 투표 결과였는데요. 이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은 전체 투표자의 72.15%인 43만4149명이었습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이 결과를 ‘오키나와 민심이 기지 건설에 강한 노(NO)를 표시한 것’이라고 해석했는데요.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미군 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와 관련해 일본에는 한 가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 전체 면적의 0.3%인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 75%가 몰려있다’는 것입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995년으로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당시 미군 병사들이 오키나와의 12세 소녀를 성폭행한 것을 계기로 미일 안보체제 전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는데요.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섬 남쪽 기노완시 한복판에 있는 미 해병대의 후텐마 기지를 섬 바깥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1년 뒤인 1996년 일본 정부는 엉뚱하게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섬 북쪽 헤노코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합니다. “후텐마 기지가 주택과 학교에 둘러싸여 위험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기지 성매매 문제’, ‘미군 범죄 문제’ 등으로 불안을 호소하는 주민들 의견은 무시됐습니다.

이를 두고 일본 정부는 “국익을 위한 희생”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희생이 한 지역에만 강요되거나 주민들이 ‘차별감’을 느낀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지금 ‘오키나와’에는 이런 ‘희생’과 ‘차별’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일본의 ‘사석’ 오키나와

오키나와 ‘차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섬의 역사와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오키나와 열도에 처음 국가가 출현한 것은 14세기였습니다. 이때 등장한 중산, 산북, 산남이라는 3개 국가는 1429년 중산왕 상파지에 의해 통일이 됩니다. 통일 오키나와의 이름은 ‘류큐’였습니다. 그런데 류큐는 1609년 일본 사쓰마번에 의해 점령됩니다. 이때부터 류큐는 중국 명·청나라에 하듯 사쓰마번에 조공을 바치게 됩니다. 이른바 ‘중일양속 체제’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체제가 깨진 것은 1879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이 류큐에 ‘오키나와현’을 설치하면서부터입니다. 이른바 ‘일본전속체제’의 시작이었는데요. 그런데 이 ‘체제’가 시작된 지 70여년 만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합니다. 이후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군 점령지’로 넘겨줍니다. 이후 20여년 동안 미군의 지배를 받던 오키나와는 1972년에야 일본으로 반환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4세기 이후 오키나와는 주변 강대국에 의해 소속을 ‘이리저리’ 바꿔야 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류큐→중일양속 체제→일본전속 체제→미군 통치→일본 순서가 됩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편입 역사가 짧다 보니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은 오키나와인들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오키나와 전투’입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역사를 통틀어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자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로 평가됩니다. 미군은 오키나와에 엄청난 폭격을 감행했고, 이로 인해 오키나와 전투는 ‘철의 폭풍’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입니다.

당시 오키나와 수비군은 육군 제32군 사령부였습니다. 이 부대를 이끈 인물은 우시지마 미츠루 중장입니다. 그는 전황이 불리하자 “최후의 1인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항복보다 도망을 다니며 항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학대하고 집단자결을 강요했습니다. 그 결과 당시 사망한 오키나와 현민 12만2228명 중 민간인이 9만4000명에 달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당시 일본 지도부는 오키나와를 미군의 본토 상륙을 늦추는 ‘사석’으로 여겼다”로 평가합니다. 사석은 바둑 용어인데요. ‘작전상 버릴 셈 치고 죽을 위치에 놓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일본 정부의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은 교육에서도 발생합니다. 1982년 6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오키나와전투에서 일본군이 주민을 학살했다’는 기록을 삭제해 버린 것인데요. 이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은 스스로 역사적 기록을 되찾고, 후세에 실상을 전하는 평화운동을 전개합니다. 이른바 ‘1피트 운동’의 시작입니다. 주민들은 모금을 통해 오키나와전투 당시 미군이 촬영한 필름들을 1피트(약 30cm)씩 사들였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 의해 삭제될 뻔한 역사가 연작 다큐멘터리 영화로 재탄생하게 됐습니다.

쟈나모토 케이후쿠 감독의 영화 ‘오키나와전의 증언’ 포스터

‘경제적 차별’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키나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관광’인데요. 이 ‘관광의 섬 오키나와’라는 이미지는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면서 조성된 이미지입니다. 이에 대해 전 오키나와 타임즈 기자 가와미츠 신이치는 “오키나와가 반환됐던 1972년 자민당 정권은 미군기지 경제에서 탈피해 오키나와만의 자립경제를 만들 방안에 대한 구상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일치합니다. “일본 정부는 경기에 영향을 받는 관광산업을 오키나와에 집중적으로 양성했고, 오키나와는 지금까지도 일본 내에서 가장 가난한 현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현재도 오키나와 경제는 일본 중앙 정부의 재정 보조와 본토 자본에 종속된 상황입니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이런 상황을 이용해 미군기지에 필요한 토지를 헐값에 매수하거나, ‘미군기지’에 대한 반발을 금전 보상으로 무력화 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키나와 미군 기지에 대한 일부 찬성 여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형성됐다는 것입니다.

■아베 총리는 한반도 문제의 ‘일본 정치화’를 노리나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은 ‘미군기지 반대’ 시위와 연결돼 있습니다. 주민들은 다마키 데니 현 오키나와 지사를 중심으로 뭉쳐 정부와 맞서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기지 이전을 더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헤노코 미군기지 공사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일본 오키나와현 주민투표에서 ‘기지 반대’가 압승을 거두자 주민들이 만세를 외치는 모습/연합뉴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면 일본은 엄연히 민족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민족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거나 ‘테러, 학살 같은 폭력 투쟁이 있어야 민족분쟁’이라는 통념이 이를 잘 보이지 않게 할 뿐입니다. 오늘날 민족 분쟁은 ‘한 국가 내 두 개 이상의 민족 집단이 벌이는 갈등’ 수준을 넘어 다층적이고 복잡한 이유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주민투표 결과가 나온 지 3일 만에 아베 총리는 이웃나라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한반도 문제를 끌어들여 국내 문제를 덮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나옵니다. 평화를 위한 일에 자격을 따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민들의 평화적인 요구에는 ‘협상’하지 않는 아베 총리가 북한과 마주 보고 ‘협상’ 하겠다는 것이 미덥지 못할 뿐입니다. 다시 한 번 한 누리꾼의 촌철살인적인 발언을 생각하게 됩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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