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피아노 조율 하며 중국집 3000곳 다녀.. "나는 고독하지 않은 미식가"

김미리 기자 입력 2019. 3. 9. 03:02 수정 2021. 3. 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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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리 기자의 1미리] 미식계의 고수, 조율사 조영권
밥벌이와 식도락
피아노 있는 곳이면 가니 새 식당 도전 기회 많아
이왕이면 맛있게 먹으려 27년간 食道樂으로 득도
뛰어난 音感과 味感
둘다 반복 경험이 중요 많이 듣다보니 音을 이해 많이 먹다보니 맛을 가늠
조율사 조영권(49)씨가 종종 찾는 인천 만수동 서인반점에서 짜장면을 시켜 한 젓가락 집었다. 뭉툭한 손가락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강릉 출장? 그렇다면 송정동 ‘짬뽕 1번지’ 해물짬뽕!’ ‘부산이라고? 화교 노부부와 따님이 하는 남산동 ‘양자강’ 군만두지.’

조율할 지역 이름을 들으면 피아노 조율사 조영권(49)씨 머릿속엔 중식 맛집 지도가 자동으로 펼쳐진다. 27년 동안 전국 각지로 출장 갔다가 들른 중국집 3000여 군데 정보가 빅데이터처럼 쌓였다.

미식가 사이에선 '퍄노조율사'라는 이름의 블로그로 유명하다. 일기 쓰듯 그날 먹은 음식과 피아노 얘기를 곁들여 올린 지 8년째. 쌓인 게시물이 2100건 정도다. 그의 글은 잔뜩 차린 성찬(盛饌)이 아니라 가정식처럼 소박하고 투박하다. 이 맛에 이끌려 블로그를 찾는 이가 7000여 명 된다. 지난해 말 중식 노포(老鋪) 38곳 탐방기를 모은 책 '중국집'(CA 북스)도 펴냈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달래려 맛난 한 끼를 찾다가 미식계 숨은 고수가 된 조씨를 만났다. 장소는 인천 만수동 서인반점. 그가 조율 일을 하면서 운영하는 인천의 한 백화점 피아노 매장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허름한 뒷골목 중국집이라고 얕보면 안 됩니다. 이 집은 배달을 안 해요. 배달하지 않으니 면이 불지 않도록 넣는 첨가제를 안 써요. 배달하는 중국집에선 면에 식소다나 면 강화제, 소금을 넣는 데가 많거든요." 조율 연장이 가득한 낡은 가죽 가방을 내려놓으며 조씨가 말했다.

숙명 같은 혼밥… 미식에 눈뜨다

―조율사와 미식가. 독특한 조합입니다.

"조율사는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갑니다. 새로운 식당에 도전할 일이 많다는 얘기죠.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자 했는데 그러다가 식도락(食道樂)에 눈을 떴어요."

―왜 중국집에 꽂혔는지요.

"전국 어디든 있는 식당이 백반집, 기사식당, 중국집이에요. 그중 '혼밥'하기 좋은 곳이 중국집입니다. 조율사는 혼자 일하니 혼밥이 숙명이거든요. 요즘에야 혼밥이 유행이지만 예전엔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중국집은 덜 그랬어요."

―샐러리맨이 혼자 식사하는 내용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들어 인기 끈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연상시킵니다(그의 책에도 만화가 곁들여져 있다).

"주변에서 그 얘기를 많이 들어 뒤늦게 몇 편 봤어요. 비슷하더군요. 다만 저는 고독하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혼자 일하고 혼자 먹어 외롭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해봤어요. 피아노와 씨름하다가 허기진 배를 이끌고 식당에 홀로 앉아 앞에 놓인 음식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데요."

―조율사니 음감(音感)은 뛰어날 것 같은데 미감(味感)도 원래 예민했는지요.

"둘 다 반복 경험하면서 후천적으로 길러졌습니다. 많이 듣다 보니 음을 이해하는 귀를 얻었고, 많이 먹다 보니 맛을 가늠하는 혀가 생긴 거지요."

본업인 피아노 조율을 하는 모습.

중식당 내공 가늠자, 볶음밥

―체득한 맛집 분별법이 있다면요.

"가끔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 국번이 두 자리인 식당이 있어요. 전주 대보장 같은 곳이죠. 국번이 세 자리로 바뀌었는데 옛 번호 흔적을 남긴 거죠. 오랜 세월 영업했다는 표시입니다. 역사가 어느 정도 맛을 담보한다는 얘기고요. 50~60대 손님이 많은 곳도 맛집일 가능성이 커요."

―실패 위험을 낮추는 메뉴 공략법이 있을까요.

"처음 가는 데선 볶음밥을 주문해요. 볶음밥을 시키면 짬뽕 국물이나 계란 국물, 짜장 소스가 따라 나와요. 이걸로 짜장면과 짬뽕 맛까지 예측할 수 있으니 전체 메뉴의 질을 감 잡을 수 있어요."

―중국집에도 지방색이 있다고요?

"볶음밥에 나오는 달걀이 지역마다 달라요. 인천과 부산은 반숙 달걀 프라이가 밥 위에 올라오고, 전라도에선 오므라이스처럼 풀어서 부친 달걀을 밥 위에 덮어요. 서울은 계란을 풀어 밥과 함께 볶는 계란 볶음밥 형태가 흔하고요."

―진짜 맛집은 숨겨 놓고 싶지 않은가요.

"맞아요. 진짜 아끼는 곳은 책에 안 넣었어요(웃음)."

―예를 들어?

"아, 비밀인데…." 몇 번 찌르자 못 이기는 척 입을 뗐다. "40년 전통의 동인천 '홍성각'."

―대표 종목별 강자를 꼽는다면요?

"짜장면은 '홍성각', 볶음밥은 서울 신림동 '팔공', 짬뽕은 충남 서천 '동생춘'. 탕수육은 여럿인데 사과를 쓰는 서울 도봉동 '홍방원', 소스와 고기 튀김을 함께 볶아 내놓는 경기도 양평 '진영관', 진안 흑돼지로 만드는 전북 익산 '길명반점'이 떠오릅니다."

조율사와 요리사, 닮은꼴 인생

먹는 재미가 사는 재미를 돋우지만 삶의 중심엔 피아노 건반이 단단히 박혀 있다. 건반 88개 중 왼쪽에서 마흔아홉 번째 건반 앞에 서면 언제나 경건해진다. 피아노의 그리니치 세계표준시랄까. '기준음'이다. 이 건반의 음을 440Hz에 맞춘 다음 현을 죄고 풀어 나머지 음을 조율한다.

―조율사 일은 어떻게 하게 됐는지요.

"어렸을 때부터 평생 먹고살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보건전문대 입학을 앞두고 진학을 포기했어요. 2년 방황하다가 조율사의 길을 택했지요."

고등학교 한문 교사를 하다가 경리 학원을 했던 아버지는 진학을 포기하겠다는 아들을 걱정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조율용 튜닝 해머와 낡은 가죽 가방을 든 조영권씨.

―다른 기술직도 많았을 텐데요.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피아노 조율하는 장면을 본 게 잊히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몇 년간 체르니 40번까지 피아노를 쳐서 피아노가 꽤 익숙했는데 피아노 내부는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었어요. 전자 회로처럼 복잡하더군요. 조율사가 작은 망치로 뚝딱뚝딱하면서 음을 하나씩 조율하는 장면이 숭고하기까지 했어요. 결국 조율 학원에 다니고 국가자격시험까지 봤습니다."

―기술 다음으로 조율에서 중요한 게 있다면요.

"인간관계요. 피아노는 정기적으로 조율해야 해요. 한번 일을 맡긴 손님은 계속 찾아 옵니다. 멀리 이사 가도 연락하는데 절대 거절하지 않습니다. 먼 길 마다치 않고 달려가는 이에겐 신뢰가 쌓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각자 물 흐르듯 살다 조율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재회하지요."

―이제까지 조율한 피아노가 몇 대나 되나요.

"1년에 300대 정도 보는데 30년 가까이 했으니 1만대 정도요?"

―사적 공간인 집에 들어가 한두 시간 머무는 특이한 직업입니다. 사람들 삶도 관찰하게 되겠습니다.

"별별 사람 다 있어요. 매장에 와서 아내에게 피아노 사주는 중년 남편을 보고 참 행복한 부부구나 했는데 피아노 조율하러 가서 보니 결혼 사진 속 남편이 같이 왔던 남자가 아닌 거예요. 명문 음대 학생이 조율을 부탁해 가 보니 연립주택 지하에 피아노를 겨우 들여다 놓았더라고요. 조율비를 차마 받을 수 없더군요. 사람 사는 게 천양지차구나 싶다가도 결국 고만고만하구나 싶기도 하고…."

―조율사 일도 많이 바뀌었지요?

"7~8년 전부터 디지털 피아노가 많이 팔리면서 조율사들 설 자리가 줄어들었어요. 전자음은 조율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쿠스틱 피아노 조율 방식도 바뀌고 있어요. 저는 여전히 소리굽쇠를 퉁 튀겨 나는 음을 듣고 기준음을 맞추는데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음을 맞추는 조율사도 많습니다. 후배들이 점점 줄어들어 안타까워요. 문 닫는 노포를 보면 남 일 같지 않아요."

―조율사와 노포의 운명이 묘하게 닮았네요.

"지켜보니 조율사와 요리사의 인생이 비슷해요. 둘 다 장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좋은 요리사는 신선한 재료로 건강한 음식의 토대를 만들고, 좋은 조율사는 한 땀 한 땀 정확한 음을 맞춰 아름다운 선율의 기본을 만듭니다. 가끔 일이 지겨워질 땐 손님에게 최고의 한 그릇을 주기 위해 한평생 주방에서 보낸 노포 주인들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습니다. 나도 저렇게 한 우물을 파야겠다고."

나이 마흔아홉. 조율의 기준음인 마흔아홉 번째 건반과 같은 숫자다. 인생의 기준음에 도달한 그가 말했다. "평생 해야 할 직업이 있고 평생 누릴 취미를 가졌습니다. 정말 즐거운 인생 아닌가요?" 건반같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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