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때 전체 왜성 그린 지도 발견

윤호우 선임기자 2019. 3. 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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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본, 정유재란 당시 왜성 40여개 쌓았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쌓은 왜성의 현황 지도가 발견됐다. 박종평 연구가는 “다양한 왜성의 존재와 형태를 보면 일본군이 우리나라 남쪽 지역을 영구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에 쌓은 왜성의 현황 지도가 발견됐다. 이 지도는 중국 국가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목판본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에 실려 있다. 책 제목은 ‘조선과 일본의 지도와 해설’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존재는 2014년에 처음으로 중국 학자인 정지에시(鄭潔西) 박사가 일본 가나가와대에서 발간하는 <비문자자료연구(非文字資料硏究)>에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이 책을 소개한 사례가 없다.

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씨가 중국 국가도서관을 통해 책의 전문을 입수했다. 이 책에는 정유재란 때 왜성의 전체적인 위치와 구체적인 형태의 그림이 실려 있다. 정유재란 당시의 그림으로서 왜성의 위치가 모두 나타난 그림은 <조선일본도설>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박종평 연구가는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처럼 왜성에 대한 전체적인 위치를 그린 지도가 없어 자료가치가 아주 크다”며 “경남과 전남지역에 세워진 다양한 왜성의 존재와 형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책에 그려진 주요 거점의 왜성에 대한 묘사는 아주 상세하다. 이중삼중으로 성곽, 성곽 앞뒤에 설치된 나무울타리와 해자가 있다.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 등의 방어시설이 그려져 있다. <선조실록>이나 진경문의 <예교진병일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등에서 울산·사천·순천왜성 전투 기록을 살펴보면, 조·명연합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왜성을 함락시킨 사례가 없다. 왜성의 방어시스템이 조·명연합군의 공격 능력보다 훨씬 우세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 속에 있는 ‘사로왜채총도(四路倭寨總圖)’. 모두 17개의 왜성이 그려져 있다.

중국 국가도서관 소장 <조선일본도설>
그림 속 왜성의 모습 중 일부는 기존에 알려졌던 그림과 거의 일치한다. 순천(예교·왜교)왜성의 경우는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울산(도산)왜성은 <울산성 전투도>(일본 나베시마보효회 소장)와 대부분 일치한다. 특히 사천왜성과 부산왜성의 경우 기존에는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없었다. 이 책 속의 그림으로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이 책에는 그동안 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왜성의 존재를 그려놓았다. 기존의 여러 연구 결과물을 살펴보면, 남쪽에 존재했던 왜성은 31~34개 정도가 된다. <조선일본도설>에서는 이들 연구물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8개의 왜성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 순천·구례·한산·김해·곤양·광양·목창·영춘왜성이다. 박 연구가는 “순천은 순천왜성과 같은 것일 수 있고, 구례의 경우는 잠시 주둔했던 곳일 수 있으며, 한산왜성은 견내량왜성, 김해왜성은 마사 혹은 농소왜성일 가능성도 있다”면서 “이런 사례를 제외해도 곤양·광양·목창·영춘왜성 등은 새롭게 드러난 왜성”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본도설>의 그림에 의하면 몇 개가 더 추가돼 왜성이 40여개에 이른다. 박 연구가는 “왜성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어서 향후 왜성 연구와 복원에 큰 도움이 될 자료”라며 “정유재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다 더 깊게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중로왜채분도(中路倭寨分圖)’

왜성의 대부분은 1597년 2월, 일본군이 다시 침입해 북상하다가 직산에서 명나라 군대에 패전한 뒤 남쪽으로 후퇴해 호남의 순천부터 동해의 울산까지 동·남해안 일대 해안 요충지에 쌓은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의 강화협상 때 전라·경상·충청도 할양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거절되자 교두보인 왜성을 쌓았다. 정유재란 당시의 왜성은 그들이 강할 때는 기동전을 위한 침략 전진기지로, 약할 때는 지구전 혹은 진지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조선일본도설>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 명나라에서 왜군의 재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다. 저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내용으로 추정해 보면, 정유재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책 중 한 목차인 ‘왜채총도설’에서 저자는 ‘1598년 가을, (…) 그들의 영루를 살폈는데 빈틈없고 세밀하게 건설되었고, 교묘한 솜씨가 잘 갖추어 있었다. 그들이 본래 방어를 잘한다고 했는데 실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려놓았으니 해양 방어를 하려는 사람이 읽기를 기다린다’고 적어 놓았다.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씨가 전문 입수
박 연구가는 “<조선일본도설>의 그림에 나타나는 왜성은 상상화가 아니라 실제로 왜성의 형태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정지에시 박사도 논문에서 밝혔지만, 명나라 조용현의 <조정우서목(趙定宇書目)>, 명나라 전겸익의 <강운루서목(絳雲樓書目)>에 이 책의 제목이 언급돼 있다.

<조선일본도설> 중 주목해서 볼 부분은 ‘사로왜채총도(四路倭寨總圖)’다. 왜채는 왜성을 지칭한다. 실록이나 당시 기록에서는 대부분 ‘토굴’이나 ‘소굴’ 등 ‘굴’로 표현했는데, 이 책에서는 왜채라고 쓰고 있다. 사로(四路)는 동로·중로·서로·수로를 말한다. 조·명연합군이 1598년 9월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나아간 네 경로를 말한다. 이 책이 일본군에 대한 공격 개시 이전에 저자가 직접 왜성을 살펴보고 그려놓았다가 나중에 정리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로왜채총도’는 지도에 대한 설명문 ‘왜채총도설(倭寨總圖說)’로 시작해 ‘동로왜채분도(東路倭寨分圖)’와 ‘동로부산채도설(東路釜山寨圖說)’,‘중로왜채분도(中路倭寨分圖)’와 ‘중로사천채도설(中路泗川寨圖說)’, ‘서로왜채분도(西路倭寨分圖)’와 ‘서로순천왜채도설(西路順天倭寨圖說)’, ‘제로왜추수채전도(諸路倭酋水寨全圖)’와 ‘수로남해왜채도설(水路南海倭寨圖說)’로 구성돼 있다.

왜성의 그림 외에도 ‘중로사천채도설’에는 사천왜성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동로왜채분도(東路倭寨分圖)’

‘심안도(沈安道)라는 사천의 왜구가 교활한 소굴을 만들었다. 그 땅은 바닷가에 매달려 연결되어 있는데, 육지에는 물길을 파서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높은 벽과 늘어선 성가퀴로 지키게 했고, 이중의 해자로 견고하게 했다. 언덕에 보루를 지었기에 네 곳으로 정찰하고 살필 수 있다.’

박종평 연구가는 “다양한 왜성의 존재와 형태를 보면 일본군이 우리나라 남쪽 지역을 영구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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