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사상 설계자' 조소앙, 토지·대기업 국유화로 복지국가 추구

지호일 심우삼 기자 입력 2019. 3. 11. 19:20 수정 2019. 3. 1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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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2부> 임시정부가 꿈꿨던 나라 ② 골고루 잘사는 균등의 경제
조소앙이 국한문 혼용으로 직접 쓴 대한민국 건국강령. 1941년 11월 공포된 건국강령은 해방 후 조국의 구체적 건국 대강을 수립한 것으로, 삼균주의의 균등 이념을 기초로 했다. 이는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핵심 정신으로 계승됐다. 문화재청 제공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三均) 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뒀다. 사회 각 계층이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균등으로 국가를 진흥하고 태평을 보전한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 민족이 지켜야 할 최고의 공리(公利)이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이렇게 천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이념은 ‘균등’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해방 이후의 조국은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나라가 돼야 한다는 절박한 바람과 갈증이 녹아 있다. 일제가 조선의 부(富) 대부분을 차지하고 조선인은 노예 상태로 전락했던 현실, 제국주의 열강의 전횡과 사회주의 이념의 세계적 확산, 독립운동 진영 내 좌·우익의 주도권 다툼 등 시대 상황이 투영된 결과물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헌법과 법령 중 경제 조항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1941년 11월 공포된 건국강령이다. 건국강령의 바탕이 된 사상은 조소앙(1887∼1958)의 삼균주의였으며, 삼균주의는 이후 제헌헌법으로 계승됐다. 균등의 건국정신은 계층 간 양극화,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되짚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평등 세상으로의 염원, 삼균주의

조소앙이 1920년 유럽 시찰 중 영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조소앙은 우리 전통 사상에 중국의 삼민주의를 더하고 유럽에서 접한 사회주의 등 서구 사상을 융합해 독창적인 삼균주의를 창안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운동과 건국의 ‘사상적 설계자’로 평가받는 조소앙은 1927~28년 삼균주의를 체계화했다.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해 만민이 안정적으로 사는 사회를 이루고, 나아가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 균등을 통한 인류 평화를 지향한 이념이다. 조소앙은 한국 전통 사상에 중국 쑨원(孫文)의 삼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등 서구 사상을 결합해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냈다.

그는 개인 간 균등에서 경제적 균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봤다. “경제 문제는 일체의 중심이며 원천”이라고 했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토지 및 대(大)생산기관의 국유화를 제시했다. 그에게 왕조 체제의 조선은 불평등의 나라였으며 일제 치하에서 불평등이 더욱 심해진 터라, 새롭게 세워질 조국에서는 반드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라고 해서 공산주의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본계급의 독재도, 노동계급의 독재도 반대했다. 균등의 개념은 기회와 권리의 평등을 뜻했으며, 공산주의가 말하는 결과까지의 평등은 아니었다.

조소앙은 한국식 신(新)민주국가 건설을 제시하며 “민중을 우롱하는 자본주의 데모크라시(민주주의)도 아니며, 무산독재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데모크라시도 아니다. 신민주는 범(汎)한국 국민을 단위로 한 전민(全民)적 데모크라시”라고 밝혔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저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삼균주의는 ‘제3의 이념’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실정을 감안한 독창적 이념이었다”고 설명했다. 삼균주의는 1930년 상해 한국독립당의 당의로 채택된 데 이어 좌·우파 정당들의 기본이념으로 수용됐다.

국유화와 공유 강조한 건국강령

삼균주의 정신에 기초한 건국강령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1941년 11월 28일 공포됐다. 태평양전쟁을 부른 일제의 진주만 공습 직전이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임시정부는 서둘러 민족국가 건설 계획을 마련한 것이다. 1919년 4월의 임시헌장이 민주공화제의 국체를 밝혔다면, 건국강령은 이에 입각한 구체적인 건국 로드맵 성격이었다.

건국강령은 총강과 복국(復國·나라 되찾기), 건국(나라 세우기)의 3장과 24개항으로 이뤄졌다. 총강에는 전통적 토지공유제에 근거해 토지를 국유화한다는 선언이 담겼다. 경제 관련 조항은 제3장 건국의 6항에 주로 등장한다.

각 개인의 균등한 생활 확보를 전제로 대생산기관·공리기업·대기업은 국유로, 중소기업은 사영(私營)으로 하며, 일제 및 부역자의 재산은 몰수해 국·공영 집단생산기관에 귀속시키도록 하는 내용이다. 노동권, 건강권 및 토지분배에 대한 규정도 들어 있다.

건국강령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거리를 뒀다. 강령이 규제하고자 했던 핵심은 과도한 불평등과 불로소득이었다. 복지국가를 구상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11일 “임시정부분들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평등주의를 생각했다”며 “사회 복지국가는 이들의 의식에 정착된 이상향이었다”고 설명했다.

해방 직후 국내 여러 정치세력이 다양한 헌법 이념과 국가 비전을 내놨지만, 경제 원칙에서 국유화와 공유를 강조하는 균등의 원칙은 좌·우파를 넘어 공통적이었다. 건국강령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헌법적 ‘교량’으로 불리는 이유다.

지금도 유효한 ‘균등의 정신’

1948년 5월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은 전문에서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명시했다. 제84조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며 균등주의를 추구한 경제 질서 원칙을 제시했다.

농지를 자경민(自耕人)에게 주는 농지개혁, 자연자원 및 공공성을 띤 주요 기업들의 국유화도 규정됐다. 계획경제를 통한 신속한 발전과 자유방임주의의 폐단을 막기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게 보장됐던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을 겪고, 미국의 자본주의적 입장이 반영되면서 헌법상 경제체제는 점차 균등보다는 자유에 무게를 두는 쪽으로 흘렀다. 다만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제119조 2항에 ‘경제의 민주화’ 규정이 살아 있듯이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균등의 정신은 현재에도 맥이 이어지고 있다.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삼균주의의 균등 사상은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연결 고리이자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고민하는 지금의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호일 심우삼 기자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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