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하고 공감했을 뿐인데 마법처럼 응어리가 풀려요

2019. 3. 12.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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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의 휴심정
1980년대 등장한 비폭력대화법
20여개국 전파되며 유엔도 주목
인디언 공동체 원탁대화에 뿌리
처벌·응보 아닌 치유·회복 초점

빙 둘러앉아 주제 정하고 대화
앞사람 말 들은 뒤 되풀이 설명
'경청-반복'만 해도 안정감 느껴
대화 막바지엔 실천약속도 정해

처음엔 어색해하고 회피하지만
거듭할수록 불만 녹고 공감 형성
학교·직장 등 갈등 해소에 효과

‘회복적 서클’ 대화 현장 르포

원으로 빙 둘러앉아 갈등 사례 때 대화법을 연습하는 참석자들.
회복적 서클 대화 패턴에 따라 조별로 역할극을 하는 참가자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러나 강산이 골백번 바뀌어도 대화는 보기 어렵다. 대화보다는 여전히 제 말과 주장과 평가만이 난무하니 양자의 독백이다. 이처럼 공감이 없는 관계는 힘들어지고, 갈등의 골은 회복되지 않는다. 인간의 과학지식은 로봇을 만들 만큼 진화했지만, 여전히 옆사람과 대화는 어려워한다.

이렇게 경청할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인공지능의 ‘코딩’과 같은 대화 방식을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어처구니없는 발상 같지만 실제 이런 구상을 실현시켜 ‘관계의 평화’에 희망을 준 인물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다. 그는 1984년 ‘비폭력대화센터’(CNVC)를 설립해 비폭력 대화법을 보급했다. 이 대화법의 핵심은 ‘듣기’다. 그냥 귀로 듣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다시 반복해서 말해줌으로써 ‘내가 당신의 말을 (‘내 편견과 판단으로’가 아니라) 그대로 듣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 간단한 대화술이 가져다준 것은 어떤 무기보다 효과적이었다.

지난 1~2일 인천 새봄교회 ‘평화영성센터 품’에서 이진권 목사와 김석봉 비폭력평화훈련센터 소장이 진행하는 ‘회복적 서클’(Restorative Circle) 워크숍이 열렸다. 비폭력 대화에 대한 마셜 로젠버그의 선구적 연구에 힘입어 등장한 새로운 모델이 ‘회복적 서클’이다. 이 모델은 학교폭력과 왕따가 많은 학교나 직장, 가족 내 갈등 현장에서 힘을 발휘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모델은 도미니크 바터라는 활동가가 인디언들이 공동체의 갈등 시 원으로 둘러앉아 대화하는 방식을 계승해 1990년대 중반 브라질 빈민가에서 사용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브라질 학교와 지역공동체에 확산되면서 브라질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됐고, 세계 20여국에 전파되면서 유엔기구에서도 주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2011년 도입된 이래 비폭력평화물결,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좋은교사운동, 갈등해결과대화, 개척자들, 회복적생활교육연구회 등을 통해 교육되고 있다.

‘회복적 서클’은 ‘회복적 정의’를 목표로 한다. 이에 대해 김 소장은 “갈등과 다툼, 피해가 생겼을 때 처벌과 강제, 구금 등으로 문제를 처리하지만, 늘 가해자는 너무 지나치게 벌을 받았다고 하고, 피해자는 너무 벌이 적다고 하며 누구도 만족하지도 않고, 당사자 간 갈등과 원한은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어서 처벌과 응보가 아닌 손상된 공동체의 치유와 관계의 회복, 공동체로 복귀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25명이 참석한 이 워크숍은 듣기 훈련으로부터 시작됐다. 둘씩 짝을 지어 마주보고, 한 명이 최근의 관심사에 대해 2분간 이야기를 하면 상대는 이를 듣고, 1분간 경청한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식이다. 참석자들은 이런 단순한 대화에서 상대가 자기 말을 경청해서 반복해주는 것만으로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다. 자기 말이 상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진 데 대한 안도감이었다. 이 연습에 익숙해지면 다음엔 상대방 말의 사실뿐 아니라 느낌과 욕구까지 경청하고 이를 상대에게 이야기해주는 훈련이 전개된다. 말만 경청하는 데서 나아가 상대방의 속마음까지 경청하는 훈련이다.

이런 기초훈련을 통해 경청이 준비되면 이제 ‘회복적 서클’이 시작된다. 먼저 조를 짜서 ‘서클’, 즉 원으로 둘러앉는다. 그리고 각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자신의 갈등 사례를 꺼내놓는다. 이날 각자가 꺼내놓은 것 가운데 투표로 선정된 대표 사례는 교회에서 장로와 집사로 절친했던 둘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생긴 갈등이었다. 집사는 회사를 운영하는 장로가 같이 일해보자고 해 입사했는데, 얼마 안 있어 사장이 ‘능력도 안 되는 인간이 일도 열심히 안 한다’고 말한 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이런 갈등이 발생했을 때 한쪽이 대화모임을 원하면 사전모임을 갖고 △어떤 말과 행동이 있었는지 △무엇을 다루고 싶은지 △대화모임에 누구를 초대하고 싶은지를 대화한 뒤 본모임을 열게 된다. 대화는 패턴이 정해져 있다. 핵심은 역시 경청과 반복이다. 진행자는 먼저 직원에게 묻는다. “지난번 일로 인해 ○○○님이 지금 어떠한지, 누가 무엇을 알아주시기를 원하시나요?” 어떤 대화든 이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 질문을 받은 직원은 “사장님이 내가 일할 때는 안 보고 잠시 쉴 때만 보고서는 게으르다고 단정해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럼 진행자가 사장에게 “무엇을 들으셨나요?”라고 묻는다. 그때 사장은 “여전히 자기가 잘했다고만 하네요”라고 동문서답을 한다. 이렇듯 경청하지 않고 자기의 판단으로 말하면, 진행자는 대화 과정을 반복한다. 결국 사장이 직원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할 때까지 한다. 만약 서로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고 의미 전달이 안 될 때는 진행자가 ‘저는 조금 다르게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입니다’ 식으로 의미를 전달해주어 대화를 돕기도 한다.

조별로 진행된 서클에서 조원들은 진행자와 사장, 직원, 팀장, 교인 등 배역을 맡아 패턴을 연습했다. 역할극을 하며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참석자들은 흥미있어 했고, 부부싸움에서도 아이를 진행자로 놓고 이 패턴대로 해보고 대화해 보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본 서클에서 대화가 잘 진행됐을 경우, 막바지엔 실행방식(약속)을 정한다. 그 약속은 두리뭉실해선 안 된다. 만약 왕따 피해자와 가해자 간 서클이라면, ‘둘이 예전처럼 매주 화요일 2교시가 끝나고 매점에 함께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처럼 약속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회복적 서클’은 무엇보다 자발성이 중요하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서클은 이뤄질 수 없다. 피해자의 경우 ‘나보고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것이냐’며 회피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 대화모임은 법정 심판처럼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사건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 말고 내면의 진심과 욕구 같은 것까지 꺼내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폭력평화물결 박성용 대표는 “학교폭력 당사자들 간 대화모임에서 처음엔 불만에 가득 찼던 가해 의심 학생이 점차 피해자의 심정을 공감하고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해지고, 피해 학생도 가슴의 응어리가 풀리는 모습을 보면 놀랍다”며 “대화는 문제아조차 회복의 기여자가 되게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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