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이 일흔에도 여전히 공자는 욕망의 인간이었다

입력 2019.03.16. 09:26 수정 2019.03.1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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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2
② 공자의 불멸성

비록 현실정치에서 실패했지만
납작하고 안이한 삶 경멸
소소한 일상을 살더라도
끝내 위대한 것의 일부 되려 해

삶 속에서 분투했던 사람
결핍 느꼈기에 과잉을 꿈꾼 사람
제자들은 그런 그를 사랑했고
'논어'를 남겨 그를 불멸케 했다
공자의 초상화. 공자의 제자들이나 <논어>의 편집자는 유려한 예식의 집전자로서의 공자만큼이나 현실에서의 실패한 선생의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다. 위키피디아

미국의 어떤 대학 졸업식에서 조선의 후예는 중얼거린다. 이곳이야말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 아닌가. 초여름에 열리는 졸업식은 한껏 기지개를 편 신록 속으로 사람들을 맞아들인다. 뭔가 짐을 벗은 듯, 화기애애한(誾誾如也) 표정의 학부모들과 학생들. 그리고 홍색과 자색으로(紅紫) 장식한 예복을 입은 교수들. 예식을 치르기 위해 신실한 모습으로(恂恂如也) 도열한 사람들 사이로 졸업생들은 종종걸음으로(足??) 행진에 나선다. 졸업장이 수여될 때마다 재학생들은 함성을 지른다. 르네상스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총장이 연단에 올라, 평소에 어눌해 보였던 사람(似不能言者)답지 않게, 지느러미같이 유려한 연설을 시작한다.(便便言) 연설을 마치고 날개를 편 듯(翼如) 위엄 있는 모습으로(與與如也) 연단을 내려오자, 사진을 함께 찍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세속화와 더불어 인간의 필멸성(mortality)에 한껏 민감해진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한 학자답게, 그는 연극적인 어조로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대들은 나를 불멸케 하려는가(immortalize)?”

‘논어’가 그리는 공자

그렇다. <논어> ‘향당’(鄕黨)편에 나오는 공자와 같은 몸짓으로, 오늘의 졸업식을 집전한 늙은 총장의 육체는 머지않아 소멸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자 주변에 모여들었던 학부모들도, 행사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던 졸업생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두 예외 없이 캄캄한 우주 속으로 소멸해 갈 것이다. 그러나 그날 함께 했던 이들의 카메라에 찍힌 예식 집전자의 공적인 재현(representation)은 사람들의 컴퓨터 디스크 속에서 반영구적인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한껏 예복으로 성장(盛裝)한 그의 공적 페르소나는 매체를 거듭해가며 불멸할 것이다. 이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학자였던 그 총장은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던 이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대는 나를 불멸케 하려는가?”

<논어> ‘향당’ 편은 공자가 예식에 참여하는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와 같은 텍스트를 통해 편집된 공자의 페르소나는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왔다. 필멸자(必滅者)로서의 육체를 가진 공자는 손아귀 속의 공기처럼 사라졌다 해도. <공자가어>(孔子家語), <공자세가>(孔子世家),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공총자>(孔叢子), <공자시론>(孔子詩論), <이삼자문>(二三子問), <노방대한>(魯邦大旱), <유가제언>(儒家諸言), <한시외전>(韓詩外傳), <춘추사어>(春秋事語) 등 오늘날까지 공자의 페르소나를 전하는 텍스트는 매우 많으며, 논어는 그 경쟁하는 많은 텍스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어떤 텍스트는 음험한 패배자의 상징으로서 공자를, 또 다른 텍스트는 패권을 구현할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공자를, 또 어떤 텍스트는 신적인 존재로서 공자를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 현행 <논어>가 하필 특징적으로 전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유려한 전례의 집행자 말고도, 논어의 편집자가 기어이 불멸케 하고 싶었던 공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예수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병자를 고쳐주는 이야기가 14번이나 나온다. <공동번역 성서> 마태복음 8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나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절하며 ‘주님, 주님은 하시고자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공교롭게도 논어에도 공자가 나병 환자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 역시 나병에 걸린 환자에게 손을 대기는 댄다. 그러나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하는 대신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그러고 끝이다.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한 예수의 행적을 상기한다면, 맥빠지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아픈 이를 고치기는커녕 한탄이나 하고 말다니. <논어>는 불타는 무능의 기록이다.

전능한 신에 비교한다면야, 공자가 무능해 보이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선생으로서 공자의 모습은 어떤가. 공자는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느냐 여부에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거듭 가르친 바 있다. 이를테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라든가 “군자는 무능함을 근심하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와 같은 언명들이 <논어>에 전한다. 그런데 <논어>의 편집자는 기어이 <논어> 텍스트 내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구나!”(莫我知也夫)라는 공자의 탄식 역시 수록해 놓았다. 스스로의 가르침마저 배반하는 사람이라고 공자를 망신 주고 싶었던 것일까.

벌써 10년도 더 전 일이다. 관운이 좋아 높은 관직을 두루 누렸던 어떤 정치인이 노환으로 조용히 별세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당시 현직 신문기자였던 선배가 내게 그 별세 과정의 보도되지 않은 진실을 전해주었다. “사실, 그 사람 그 날 아침에 화장실에서 똥 싸려고 힘주다가 죽었어. 모양새가 빠지니까 그런 건 기사화하지 않은 거지.” 그리하여 그 정치인은 관운을 누릴 대로 누리다가 우아하게 선종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논어>의 편집자는 가차 없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구나!”라는 공자의 탄식을 기어이 수록해서, 공자를 모순에 찬 인물로 만들어 놓고 만다.

이리하여 <논어>가 전하는 공자는 생각보다 무능하고 예상보다 모순적인 인물. 이는 공자가 우리처럼 보통 인간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질병에 취약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의외의 부분에서 까탈스럽고, 남들의 험담에 시달리고, 불건전한 생각도 종종 해가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다가 손에 묻히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거라는 말이다. 나중에 성인(聖人)으로 둔갑하게 되는 공자의 나날들도, 그의 살아생전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적당히 방만한 순간들과, 충분히 진실하지 못했던 순간들과, 최선을 다하지 못하여 안타까운 순간들과,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던 순간들로 채워져 나갔을 거라는 말이다. 그도 우리처럼 비틀거리면서 인생이라는 시간의 철로를 통과해갔을 거라는 말이다.

서투른 열정의 인간

다만 놀라운 것은, 그가 끝내 욕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다 갔다는 점이다. 그는 비록 현실 정치에서 실패한 인간이었으되, 납작하고 안이한 삶을 찬양했던 사람은 끝내 아니었다. 다이소 진열대 위에 쪼그려 앉아 먼지를 이고 있는 이쑤시개같은 이들은 가차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아! 그 잘디잔 사람들이야, 따져볼 가치도 없다.”(噫, 斗?之人, 何足算也.) 공자는 차라리 과잉을 찬양한다. “중도의 길을 가는 사람을 얻어 함께 할 수 없다면, 반드시 뜻이 높은 사람이나 소신을 지키는 자와 함께 하겠노라!”(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乎.) 현행 <논어> 텍스트가 전하는 공자는 소소한 일상을 살더라도, 끝내 위대한 것(斯文)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만약 하늘이 이 문명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광 지역 사람들이 나를 감히 어쩌겠는가?”(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그 어떤 감정적 격동이나 미련도 없이 차갑게 목전의 합리적 선택에만 골몰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공자는 거듭 반문한다. 어떤 열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가 “인한 사람”일 수 있겠느냐?(焉得仁)

중국 산둥성 취푸시에 있는 공자의 묘. 위키피디아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공자 평생의 종착점을 읽어보자. “70세에,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멋대로 해도 다 도리에 맞는 경지, 스스로 기준이 되는 경지. 이 찬란한 혹은 오만하게까지 들리는 자기 자랑. 더 얄미운 것은, 그러한 경지를 타고 난 자질로 가정하지 않고(非生而知之者), 부단한 인생 역정 속에서 멈추지 않았던 배움의 결과로서 설정하는 태도이다.(不如丘之好學也) 오늘의 자신은 늘 어제보다 조금이나마 나은 자신이었으며, 그 결과 멋대로 해도 되는 경지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선언. 그러나 진정 감탄스러운 것은 나이 일흔에도 여전히 공자는 욕망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보니 욕망이 사라진다고 말하거나, 오랜 수양 끝에 욕망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은 욕망을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질주해도 여전히 궤도 위에 있는 기차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공자는 영생하는 신이 아니었기에,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부터 거리를 둔 사람이었기에, <논어>가 전하는 이러한 공자의 페르소나는 실로 삶이라는 유일무이의 이벤트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이벤트에서 끝내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사람, 과잉을 찬양했던 사람, 노년에 이르러도 그치지 않는 배움이라는 긴 마라톤에 출전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사람. <논어>는 그렇게 분투한 사람에 대한 재현이다. 누가 그랬던가. 아무리 배고프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있어도 누군가 밥을 짓지 않으면 굶주림이라는 난관은 타개되지 않는다고. 인간은 생각보다 게으르다고. 보통 사람들은 사채를 빌리지 않는 한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공자는 사채빚 없이도 삶 속에서 분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동시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정치라는 현실의 철로를 달리고 싶었으나 달리는 데 실패한 사람이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질문의 책’이라는 시에서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차보다/더 슬픈 게 세상에 있을까?”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이나 <논어>의 편집자는 유려한 예식의 집전자로서의 공자만큼이나 현실에서의 실패한 선생의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다. 결국, 기적과는 인연이 멀었던 사람, 신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했던 사람, 결핍을 느꼈기에 과잉을 꿈꾸었던 사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을 사랑했던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때로 완벽하게 계산하고 행동하는 합리적 인간보다는 서투른 열정의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끌리곤 하지 않던가. 누가 그랬던가, 완벽한 복근을 가진 사람보다는 쥘 수 있는 한 줌의 뱃살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된다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고 여기는 사람보다는 매미가 오래 살기를 바라며 흐느끼는 사람에게 매료된다고. 매료된 이들은 텍스트를 남기고, 남겨진 텍스트는 상대를 불멸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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