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선 넘었다.. 친일경찰 노덕술과 뭐가 다르냐"

김종훈 2019. 3. 1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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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팟인터뷰]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 정희철 회장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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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 잡은 나경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남소연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 또다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해달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 14일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위와 같이 언급했다.

발언 후 정치권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나 대표가 오히려 국론을 분열시킨 것"이라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정당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 아니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독립유공자와 후손들과 관련 단체 역시 나 대표에게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애국지사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는 나 대표의 발언이 공개된 후 "해방 후 친일경찰 노덕술이 한 발언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라면서 "반민특위가 탄생했을 당시에도 나 의원처럼 친일파들이 '국론분열'을 언급하며 반민특위 활동을 반대했다"라고 강조했다.

반민특위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01조에 의거해 만들어진 특별조사기구로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성원 속에 탄생했다. 2.8독립선언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상덕 선생이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방해와 노덕술 등 친일세력의 특위 위원 암살 음모, 국회 프락치 사건 등을 겪으며 설치 1년여 만에 강제 해산됐다. 반민특위가 좌초하면서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위에 대한 처벌은 공식적으로 1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나경원 대표 발언 선을 넘었다"
 
 반민특위의 최린 재판 보도(연합신문, 1949.4.21.) (연합신문)
ⓒ 정운현
 
14일 나경원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국론분열' 발언 이후 <오마이뉴스>와 전화 인터뷰한 김상덕기념사업회 정희철 회장은 "나경원 대표의 발언은 선을 넘었다"라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정 회장은 "김상덕 위원장이 활동했던 당시 반민특위도 '국론분열' 같은 말들이 이어지다 해체된 것"이라면서 "당시 반민특위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나경원 의원처럼 발언할 수 있는) 이런 상황에 빠졌겠느냐"라고 개탄했다.

실제로 반민특위법 제정 과정에서부터 친일파들의 방해가 매우 거셌다. 특히 제헌의원이자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몸담았던 김준연 등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시행되면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는 이유로 '반민법' 제정에 반대했다.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구선생 바로 뒤쪽에 서있는 인물이 김상덕 선생이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1948년 9월 7일 당시 제헌국회는 국민의 성원을 등에 업고 찬성 103명, 반대 6명의 압도적인 수치로 '반민법'을 통과시켰다. 특히 반민특위는 산하에 특별재판부와 특별검찰부를 둬 수사권과 기소권, 재판권을 바로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말 그대로 유례없는 친일청산의 확실한 기구였다.

이후의 과정은 단 한 번도 순탄치 않았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형성된 강고한 친일세력의 저항이 곳곳에 가득했다. 1948년 10월 예비조사를 시작으로 1949년 1월 5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나 불과 8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노덕술 등 친일파가 암살자를 고용해 반민특위 위원들을 살해하려고 했다. 암살 기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사상범의 굴레를 덧씌웠다. 바로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를 비롯해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소속이던 노일환 등 진보적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라는 혐의로 하루 아침에 체포당했다.

친일파의 지원을 받은 시민들은 매일같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와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문을 부수는 등 위협을 가했다.
 
 반민특위 당시 체포됐던 친일경찰 노덕술(왼쪽). 그는 암살자를 고용해 반민특위 위원들을 죽이려고 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김상덕 위원장 등 반민특위 위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1949년 6월 4일 당시 경찰 수뇌부였던 친일파 최운하를 체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내무차관 장경근과 시경국장 김태선 등은 6월 6일 오전 7시에 중부서장 윤기병을 시켜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특위 소속 특별경찰대(특경대) 경찰들을 오히려 체포했다. 특경대가 습격을 당한 후 경찰은 김상덕 선생을 비롯해 반민특위 주요 인사들을 가택 연금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9년 6월 9일 A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습격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6월 11일에는 "반민특위 활동으로 민심이 소요되어 부득이하게 특경대를 해산하였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1949년 7월 6일 반민법 공소 시효 단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 개정안이 큰 저항 없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김상덕 위원장은 정부개정안이 통과된 뒤 특위 주요 인사들과 함께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김상덕 위원장 납북, 가족들은 연좌제로 고통"

정희철 회장은 "나경원 대표의 발언은 당시 친일파들의 주장과 같다"라면서 "사실을 왜곡한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려고 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행태"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광복 70년이 넘었는데 우리는 친일파를 언급하면 '국론분열'이라는 이상한 말을 한다"라면서 "그때 제대로 역사의 걸음을 밟아나갔다면 (나 대표가)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정 회장은 "지금 나경원 대표의 발언을 보면 해방 후 잠시 숨죽였던 친일파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며 다시 득세한 것과 다르지 않다"라면서 "독립운동의 1세대가 사라지고 이제 2세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3세대의 시대가 오고 있는데 과연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2.8독립선언을 주도한 김상덕 선생. 해방 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다.
ⓒ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 귀국 장면. 맨 뒷 줄 좌측에서 다섯번째 인물이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선생이다.
ⓒ 위키피디아
 
돌아보면 정 회장의 걱정에는 김상덕 선생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그는 "김상덕 선생이 반민특위 위원장을 하셨기 때문에 이 점을 널리 알리려고 김상덕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라면서 "김 선생이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은 건 말 그대로 그가 가장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선생만큼 민족독립을 위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애쓴 분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김상덕 선생은 1891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1956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애국지사로, 3.1운동의 불씨가 된 동경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사건으로 투옥된 선생은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출신 의원에 선출됐다.

이후 선생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렸다. 특히 약산 김원봉, 백범 김구와 두루두루 가까이 지내며 지근 거리에서 함께 활동했다. 반민특위 위원장에 선출된 것도 선생의 이러한 이력이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납북 당했다. 이후 남은 가족들은 연좌제로 고통을 받으며 평생을 어렵게 지냈다. 1990년에야 정부는 김상덕 선생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상덕 선생의 장남 김정륙씨는 이미 초로의 노인이 된 상태였다. 김상덕 선생은 1956년 4월 28일 평양시 용성구역 용흥1동에 조성된 '재북인사의 묘'에 잠들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된 김상덕 제헌국회의원의 장남인 김정륙 전시납북국회의원유족회 회장이 <오마이뉴스>와 만나 지난 2006년 10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힌 선친의 묘소를 누이와 함께 찾아 참배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2013.6.17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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