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볼턴은 전쟁을 원하는가

2019. 3. 1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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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백인 기병대장’ ‘인간 쓰레기’라 불리는 극우파
그가 편히 잠들어도 한반도에선 잠 설치는 사람 늘어

연합뉴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쓴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이렇게 적었다. 최근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80년 전 조지 오웰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 빼고 당신들이 알아서 이겨줬으면

조지 부시 행정부 때 볼턴 보좌관은 이라크전쟁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슈퍼매파’(Super-hawk)로 꼽힐 정도로 극단적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다.

‘전쟁광’이라 일컫는 볼턴 보좌관은 베트남전 당시 군복무를 어떻게 했을까? 1948년생인 볼턴 보좌관은 1966년 미국 예일대에 입학했다. 그가 예일대를 다닌 1960년대 후반 미국 대학가에서는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거셌다. 당시 미국은 지금처럼 모병제가 아니라 징병제였다. 그는 또래 대학생들과 달리 베트남전을 지지했다. 그는 베트남전 반대 시위대를 “우주 외계인처럼 느껴진다”며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는 1970년 예일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곧 나올 예정이던 베트남전 징집 영장을 기다리지 않고 메릴랜드 주방위군으로 입대해 4년간 군복무를 했다. 당시 주방위군 입대는 베트남전 파병을 피하는 방법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도 베트남 대신 안전한 텍사스에서 주방위군으로 군복무를 마친 바 있다.

볼턴 보좌관은 예일대 졸업 25주년 기념 책자에 “나는 동남아의 논에서 죽기 싫었다. 베트남전은 이미 졌다고 생각했다”고 베트남전 참전 대신 주방위군 입대를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볼턴 보좌관 같은 사람을 미국에서는 ‘치킨호크’(Chickenhawk)라고 한다. 치킨은 겁쟁이, 호크는 강경파를 뜻한다. 1970년 미국 시사풍자 코미디 진행자의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베트남 문제와 관련해 내 친구 가운데 스스로를 치킨호크라고 하는 녀석이 있는데,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라지만 자신을 빼고 우리끼리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미국 신문 <뉴햄프셔 가제트>는 치킨호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남성 공직 인물로서, 첫째 정치적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동시에, 둘째 개인적으로 전시 병역의무를 한사코 피하려는 인물.’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벌인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 고위 정책결정권자 가운데 치킨호크가 상당수 있어 논란이 됐다. 한국 내 사정도 비슷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남북관계가 악화됐을 때 치킨호크들이 강경 대응을 주도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 때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안보대책회의를 하는데, 대통령부터 국가정보원장, 여당 대표까지 참가자 가운데 국방부 장관 한 사람만 빼고 모두 군 미필자였다. 요즘 안보를 강조하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만성 담마진(두드러기)으로 군대에 가지 않았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볼턴 보좌관이 연일 언론 인터뷰에서 대북 강경 메시지를 쏟아냈다. 그는 동시적·병행적으로 표현되는 단계적 비핵화 접근 방식을 접고 모든 핵시설과 대량파괴무기를 한꺼번에 폐기하는 ‘빅딜’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동안 북한과의 실무 협상을 주도했던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도 3월11일 기존 단계적 비핵화 접근 방식을 뒤엎고 ‘완전한 비핵화’만이 유일한 협상 조건이라고 못박았다.

지난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장에 앉은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맨 왼쪽). 연합뉴스

볼턴의 말이 미국의 입장으로

볼턴 보좌관의 말이 미국의 입장이 되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볼턴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 나온다. 미 정치전문지 <애틀랜틱> 4월호는 “오로지 트럼프 대통령의 질문에만 답하는 볼턴 보좌관은 이제 미국 안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됐다”고 평가했다. 볼턴 보좌관은 지난해 ‘리비아식 모델’을 거론했다가 북한의 거센 반발을 샀다. ‘선 핵폐기 후 보상’인 리비아식 모델의 빼대는 북한이 빅딜 수준의 비핵화 조치를 이행해야 상응 조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볼턴 보좌관의 상징은 콧수염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초기 <폭스뉴스> 회장이던 로저 에일리스가 “워싱턴의 기존 정치와 외교를 뒤흔들려면 볼턴이 필요하다”며 볼턴을 추천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갑자기 콧수염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볼턴은 그 콧수염이 문제야.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화염과 분노: 트럼프 백악관의 내막>)

미국이나 한국이나 고위 공직자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사람은 거의 없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볼턴 보좌관을 기용한 건 결국 그의 콧수염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칼럼을 싣기도 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콧수염을 기를 만큼 고집이 센 아웃사이더 성향을 트럼프 대통령이 높이 샀을 것이라는 게 이 신문의 해석이었다.

볼턴 보좌관의 이력을 살펴보면 아웃사이더 기질이 뚜렷하다. 그는 1948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방관, 어머니는 주부였다. 주변에 노동자 가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집안에서 첫 대학 진학자였다. 다른 네오콘들은 엘리트 집안 출신이 많았다.

네오콘들이 젊었을 때는 좌파였다가 나이 들어 우파로 전향한 것과 달리, 그는 10대부터 골수 우파였다. 볼턴은 17살인 고등학생 때 공화당 대통령선거 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미국 ‘보수의 아이콘’ 배리 골드워터(1909~98) 상원의원이 대선에 출마하자, 자원봉사를 했다. 골드워터는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자유 수호에서 극단주의는 결코 악이 아니다”라고 외칠 정도로 극보수였다. 골드워터는 당시 적국인 소련에 대해 “섣부른 협상은 양보를 초래한다”며 자유를 지키는 한 가지 길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소련에 맞서 소련의 퇴각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볼턴 보좌관의 대북 전략은 골드워터가 제시한 대소련 전략을 따라한 듯 보인다.

불신의 오래된 역사, 변치 않는 생각

볼턴은 네오콘의 핵심으로 꼽힌다. 네오콘은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주도하면서 이라크전쟁을 벌였다. 네오콘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자비로운 패권주의’를 표방하면서 ‘고귀한 거짓말’을 일삼는다. 쉽게 말해 이들은 미국이 하는 모든 일은 ‘정의’이며 ‘자비’라고 생각한다. 북미 대륙에 이주한 영국인들이 원주민 인디언들을 마구 죽이고도 정의와 자비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정세현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이 볼턴 보좌관을 인디언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백인기병대장으로 비유해 논란이 일었지만, 네오콘의 이런 사상적 배경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북한과 볼턴의 악연은 뿌리 깊다. 2002년 1월 부시 정권은 ‘악의 축에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포함시켰다. 볼턴은 당시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차관이었다.

2002년 8월, 미국 국무부 관료들이 북한과 협상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뜻밖에 방북 기간에 미국과 북한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두고 대립했다.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당시 미국의 강경 대응을 주도한 인물이 볼턴이라고 한국과 미국 고위 관료들이 증언했다. 이들은 볼턴이 조잡한 형태의 정보로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무리하게 꺼내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1차 북핵 위기 타결책)를 파탄 낸 장본인으로 여긴다. 볼턴도 당시 한-미 정부 협상파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햇볕정책 전도사’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골수 북한 옹호자’(real DPRK apologist)라고 했다.

2003년 볼턴은 강연에서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폭군적인 독재자’라고 했다. 이에 발끈한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볼턴을 ‘인간 쓰레기’ ‘피에 굶주린 흡혈귀’라며 맞불을 놓았다.

볼턴이 공직에서 물러나고 2007년 펴낸 회고록의 제목이 <항복은 선택이 아니다>(Surrender Is Not an Option)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자협력에 기초한 국제기구와 미 국무부 외교관의 협상을 ‘항복’이라며 조롱하고 깎아내렸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북 압박할 때마다 트럼프 지지율은 올라가

시간이 꽤 흘렀지만, 북한을 극도로 불신하는 볼턴의 생각은 요지부동이다. 볼턴은 지난해 국가안보보좌관에 발탁되기 전 <자유아시아방송>(RFA)과 한 인터뷰에서 “나는 북한이 진지하다는 데 회의적이다. 그들은 시간을 벌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북한 인민들을 위해 경제적 발전을 원한다면, 한반도 분단 제스처를 끝내고 북한이 한국 정부에 통일을 요청해야 한다”며 “그것이 북한 인민을 지원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볼턴이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자, <뉴욕타임스> 사설 제목이 ‘볼턴은 정말 위험하다’였다. 이 신문은 “볼턴만큼 미국을 전쟁으로 이끌 가능성이 큰 사람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볼턴 보좌관이 앞장서 북한을 압박할 때마다 트럼프 정부 지지율은 올라가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업체 라스무센이 집계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3월8일 기준으로 50%를 회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 마이클 코언 청문회가 있었음에도 트럼프 정부 지지율이 올랐다. 지난해 1월 셧다운(연방정부 일시적 업무 정지) 우려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44%(라스무센 조사)로 떨어진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볼턴 카드’는 대북 압박과 국내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양수겸장이다.

볼턴은 2007년 1월 유엔대사에서 물러난 뒤 <미국의 소리>(VOA)와 한 인터뷰에서 ‘강경정책을 주장하며 많은 비판과 반대에 직면했는데, 지치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란 질문을 받았다. 볼턴은 이렇게 답했다. “그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내가 밤에 편히 잠들 수 있는가다.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진실로 믿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믿는 진실을 이야기하며, 그렇기 때문에 편안할 수 있다.”

볼턴 보좌관이 편하게 잠드는 요즘, 한반도에선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늘고 있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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