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견문록 ⑨시안] "생 마감할 때까지 통한의 역사 증거..초심 잊지 않을 것"
경성사범학교 재학 중
'징집 1호' 끌려가
중국에 일제 전선 배치
임정 찾아 목숨 건 탈출
"망국 백성이 아닌 근거는
오로지 임정 덕분,
1948년 건국절 주장은
역사 왜곡, 용납 어려워
올해는 '왜 나라 잃었는지'
자문하는 한해 돼야"
◆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 ◆
그 후 75년이 지났다. 저 '스무 살 청년'은 어떻게 됐을까.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출신 김영관 옹(翁·95)이다. 탁자에 기억이 쏟아졌다.
―영장(令狀)에서 시작할까요.
▷그 '빨간 딱지'를 내 여전히 기억하지. 그날로 삶이 바뀌었으니까. '왜 징집이 됐느냐'고 묻자 '나라에 봉사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일본 선생이 되묻습디다. 그때 생각했죠. 일본을 위해 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황, 불쾌, 저항, 혼란, 불안…. 정의 불가한 감정이었지.
―탈출 전 풍경을 회고하신다면.
▷함흥 제43부대에서 한 달 훈련받고 기차 타고 중국 둥양(東陽)현에 배치되니 부대원 40명, 조선인은 그 가운데 5명이었습니다. 신의철, 김권이 탈출에 동조했지. 국민당, 공산당, 일본 난징 괴뢰정부까지 군대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탈출에 성공해도 장제스 군대로 가야지, 마오쩌둥한테 가긴 어렵고, 난징정부로 가면 즉결심판 총살이니까…. 부대들 초소부터 파악하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소변 보는 척 빠져나와 돌다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부대가 난리가 났겠는데요.
▷이제서야 편히 얘기하지, 순간마다 벽에 부딪히듯, 목숨 내건 탈출이었습니다. 화장실 옆 도랑으로 뛰어내려 500m, 1㎞를 셋이서 냅다 뛰었소. 어슴푸레한 석양에서 부대를 바라보니 조용하더만…. 음력 스무날이라, 달도 밝아 길을 찾는데 수월했소. 조상이 도왔지. 익일 오후 3시, 중국 유격대원을 만났소.
―최전선 배치였다고요.
▷앞서 선린상업학교 재학 중에 '충칭에 우리 임시정부가 있더더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탈출을 이끈 한마디였습니다. 그래서 충칭에 가려고 하니 탈출 후에 보니까 불가능한 거리였소. 중국군에서 광복군으로 인계돼 제1지대 제2구대로 편입됐습니다. 그날, 태극기를 처음 봤어요. 학도병 10명 포함해 한 20명 정도였나. 태극기 앞세우고 따라가며 영국 민요를 개사한 애국가를 불렀지. 어려서 태극 문양은 봤었는데 사괘(四卦) 그려진 태극기는 그날 처음 봤습니다. 기적이었지. 그때 심정이 생의 초심(初心)이라오.
―임정은 당시 어떤 의미였을까요.
▷내가 망국의 백성이 아닌 근거는, 희미해도 분명히 존재했던 임정 때문이오.
―합류 이듬해 광복이 왔습니다.
▷광복이 '빨리' 왔다는 생각은 했소. 왜냐면 직전까지도 '우리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10년 후에는 갈 수 있을까' 이런 대화하던 때였거든.
―고국으로 가는 LST 수송선에서 과거의 회한이 많으셨겠습니다.
▷소변 보려면 갑판으로 가야 했어요. 신의철, 김권과 LST 수송선 갑판에서 작아지는 상하이를 보며 다짐했소.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신탁통치, 미소 갈등, 중국 국공분열도 현실의 고민이었고….
―귀국 후 감정을 떠올리신다면.
▷하루 지나니 부산 오륙도가 눈에 들어옵디다. 하선 직후 엎드려 울며 오랫동안 부두에 입을 맞췄소….
―그때가 1946년 3월이었죠.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가고 싶으셨을 텐데요.
▷갈 형편이 못 됐고, 백범 선생이 귀국하던 항공편으로 고향에 편지는 보냈습니다. 나중에 보니 도착하지 않았더군요.
―편지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어찌 잊겠소. '아직, 살아 있다.'
―보상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하셨습니다. 유공자 처우는 여전히 미약한데요.
▷현실적인 얘길 해볼까요. 보훈 목적은 '명예'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소. 세종문화회관에 불려 갔더니 앉을 자리가 없습디다. 2층도 꽉 차서 오르니, 3층에 백범 선생 비서 선우진 선생이 혼자 앉아 계셨어요. 나란히 앉았죠. 오래전 일이고, 이제 그런 일은 없지만. 대접해달란 게 아니오. 유공자를 대하는 모습은 국민에겐 '거울'이란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역사는 어떤 힘이 있을까요.
▷'왜 나라를 잃었느냐'는 물음과 맞닿는 질문입니다. 파당과 분열, 부조리와 부패, 정세에의 둔감, 국민들의 무관심이 버무려진 결과가 국치 아닙니까. 백 년 전과 달라졌는지, 자문해 보십시다.
―2016년 8월, 전(前) 대통령 앞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은 역사 외면"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청와대에서 나와 귀가하려는데 전화통에 불이 났소. 당시 언론들이 '일갈'이라 제목에 썼는데, 그 표현은 과해요. 한국광복군으로서 마땅한 '건의'입니다.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에 탄생했습니다. 임정과 광복군은 불가분 관계이고 군(軍)이 있었으므로 임정은 국가인 겁니다. 임정을 외면하는 건 용납이 어렵습니다.
―끝으로, 관념 섞인 질문입니다. 시간을 초월해, 1944년의 김영관이 옆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볼까요. 수로로 탈출하던 그날의 '나'에게 건넬 말씀은.
▷(긴 침묵) 영관아, 잘했구나…. 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통한의 역사를 늘 증거하자꾸나. 초심을 잊지 말라….
네 시간의 인터뷰를 마친 오후 3시, 자택 인근에서 선생이 사주신 갈비탕 한 그릇을 비운 뒤 헤어졌다. 짙은 카키색 코트를 입은 그의 뒷모습과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봄 나무에서 이국땅의 봄을 맹렬히 탈주하던 한 젊은 광복군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춘래불사춘이었다.
■ 공동기획 : 매일경제신문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후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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