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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왕이 모범생이던 시절은 갔다

김유태 입력 2019. 03. 29. 17:27 수정 2019. 03. 3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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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미래 / 존 카우치·제이슨 타운 지음 / 김영선 옮김 / 어크로스 펴냄 / 1만5000원
재수 없는 얘기다. 공부는 좀 했다. 5독(讀)이 원칙이었다. 재수(再修)도 없었다. '사람 사는 건가' 싶어 후반전부터는 봤지만, 이탈리아전(戰) 전반전 종료 휘슬이 울리던 2002년 6월 18일, 고3을 핑계 삼아 도서관에 있었다. 오지선다형 시험지는 전지전능한 요물이었다. 암기에 열광적일수록 기억력은 '똑똑함'으로 둔갑했다. 박제된 지식을 아예 외워버리는 '교육 게임'이 12년 차에 접어들던 그해 겨울, 요즘 용어로 '학종 수시' 합격증 몇 장을 손에 넣었다. 땔감 없는 잿더미는 밑바닥을 드러냈다. 목적 없던 공부는 들통나며 종결됐다. 1년 뒤에야 깨달았다. '똑똑한' 바보일 뿐이었다고.

"백년대계 교육"이란 구호만 나부끼는 교육 현장을 박살내려는 괴물 같은 명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단 한 번도 불이 꺼진 적 없는 거대한 실험실, 저 무수한 '교실'의 무책임한 탁상공론 당사자에게 막막한 해답을 묻는 걸작이다. '스티브 잡스가 스카우트한 54번째 애플 직원, 애플 수석 고문 겸 교육 담당 부사장, 버락 오바마 정부 교육정책 애플 대표.' 뜨악할 만한 명함을 쥔 저자는 놓치고 살던 공부의 본질을 곱씹고, 이 세계의 학교와 가정의 무수한 '꼰대'에게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결론부터 요약할까. '박제된 콘텐츠(content)가 아니라 맥락(context)과의 접속이 교육의 본질이다.'

저들은 생일(生日)부터 21세기다. 디지털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얘기다. 부적응자가 되지 않으려고, 틀에 적응하는 법을 알아내려고 필기하고 암기하며 빈 괄호를 채워넣던 우리가 아니다. 주당 1회뿐인 '컴퓨터와 생활' 시간에 뚱뚱한 CRT모니터의 '한메타자연습'을 켜고 300타(打) 달성 여부와 베네치아 벽돌섬을 몇 단계까지 지켜냈느냐로 "컴퓨터 잘하는 애"의 권위를 획득했던 세대와, 만 3세가 되기도 전에 유튜브 '광고 건너뛰기'를 누르며 모바일리티를 몸소 보여주는 저들 세대는, 영혼의 회로가 본질부터 서로 다른 호모사피엔스다.

온몸에 기름을 붓듯, 디지털(digital) 환경을 뒤집어쓰며 태어난 21세기 아이들은 20세기가 생일인 `아재` 내지 `꼰대`와는 인지 회로부터 상이한 호모 사피엔스다. 단기 기억력이 요구되는 정보의 소비는 교육의 본질이 아님을 간파한 저자는, 기술과 교육의 공존을 책에서 제시한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뱅크]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그러면 뭘 가르치란 얘긴가.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고사리 같은 손에 태블릿PC부터 쥐여줘라. 둘째, 소비 아닌 생산을 배우게 해라. 셋째, 기술언어인 코딩을 교육해 디지털 문해력을 길러줘라. 접근성(Access), 제작(Build), 코딩(Coding)의 'ABC 법칙'이다. 얼마나 외웠느냐에 따라 득점, 레벨, 승패가 갈리던 암기자(memorizer)는 21세기의 모범생이 아니다. 대통령까지는 좀 그렇다고 해도, 자의든 타의든 과학자나 교사가 인생 직업이던 '아재' 세대의 사고방식에 견준다면, 유튜버가 '희망직업 5위'란 작년 교육부 설문의 결과는 철부지들의 농담만은 아닌 거다.

디지털 네이티브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미국 풍경은 한국과 천양지차다. 하원이 종료되면 가난한 지역에 느닷없이 주차돼 '태양열 기기를 장착한 와이파이 핫스폿'으로 변하는 캘리포니아주 코첼라밸리의 스쿨버스, 114개 취약지역 모든 학생에게 아이패드를, 교사에겐 아이맥을, 모든 교실엔 애플TV를 제공하는 애플사의 기부 프로그램, 학교 교육과 병원 진료를 통합해 '성장'을 설계하는 챈과 마크 저커버그의 프라이머리스쿨, 영양실조 없는 세상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아이튠스에 올려 다운로드 수 1만2000회를 돌파한 댈러스 교외 코펠고등학교의 이야기를 읽으면 손에 땀이 흥건하다.

"친한 사람 4명씩 모여 앉으세요." 개강 첫날 저 얘기가 나오면 새벽부터 눈 비벼가며 신청했던 '꿀강의'를 드롭(drop·수강신청 사후 취소)하는 게 한국 대학생의 흔한 풍경이다. '제가 시험이 많은데 대신 해주시면 안 돼요?'란 눈물 젖은 카톡을 발표 전날 새벽 3시에 듣기 싫어서만은 아니다. 무의미한 도전을 교수로부터 강요 당하기 싫어서다. 책의 저자는 도전 기반 학습과 프로젝트 기반 학습에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다. 사회문제나 지역 현안과 무관한, 환언하자면 도전이 제거된 프로젝트 설계는 공허하다. 발표 수업을 이유로 준비를 등한시하는 상아탑의 일부 교수는 뜨끔하겠다.

스티브 잡스가 책의 곳곳에 어른거린다. 첫 문장부터 이렇다. "이 책을 스티브 잡스에게 바친다." 현대판 다빈치로 추앙받은 잡스는 정규 교육과 거리를 뒀다. 10세 때 컴퓨터에 흠뻑 빠졌고 데스크톱 컴퓨터를 본 직후 잠재력을 알아챘다. 디지털 문해력으로 세상을 바꿔버린 잡스는 인류의 '세 번째 사과'를 베어 물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100원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오락실 갔다왔다고 담임에게 자로 맞고, 학원 가다가 PC방 다녀왔다고 엄마, 아빠에게 꿀밤을 맞아야 했던 오욕, 치욕, 굴욕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한, 결코 이 땅에 '네 번째 사과'는 열리지 않는다는, 미래에서 온 '교실 이데아'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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