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강권 마세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새 학기 대학가 '알코올 팔찌' 인기

정준기 2019. 3. 30.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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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연세대 총동아리연합회가 각 동아리에 배포한 '알콜귀요미팔찌' 매뉴얼. 숭실대 총학생회의 '술강권금지팔찌'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연세대 총동아리연합회 제공

“‘술 강권 금지 팔찌’를 사용하는 동아리라면 두려움 없이 참여해서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아리는 좋은데 강압적인 술 문화는 싫다는 학생들이 많으니까요.”

29일 어느 동아리의 ‘알코올 귀요미 팔찌’를 본 한 연세대 신입생의 말이다. 이 팔찌는 연세대 총동아리연합회가 학내 동아리 17곳에 나눠 준 것이다. 그 날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에 따라 색깔을 달리한 팔찌를 차고 있으면, 술을 막무가내로 권하는 게 아니라 그 양에 맞춰 적당히 권하자는 아이디어다. 신입생 환영회, 멤버십 트레이닝(MT) 등 학기 초 활발해지는 각종 동아리 모임에서 쓰기 위해 제작됐다. 지난 16일까지 수요조사를 벌여 참여 의사를 밝힌 동아리에게 우선 배포했고, 반응을 보고 더 확대할 생각이다..

3월 대학가에 ‘술 강권 금지 팔찌’가 유행이다. 음주 사고 때문에 예전만은 못하다지만 젊은 혈기에 소속감을 키운다는 목적으로 엄청난 통과의례라도 되는 양 호기롭게 술을 마시고 강권하는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로 인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취지다.

연세대 총동아리연합회의 팔찌는 숭실대 총학생회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숭실대 총학생회는 올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때 술 강권 금지 팔찌를 만들어 제공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조선대 양성평등센터 역시 학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난 20일 MT철을 앞두고 술 강요 자제를 당부하는 문구가 담긴 ‘존중 팔찌’를 만들어 과별로 배포했다. 서울시립대는 이미 지난해 OT부터 비슷한 방식으로 명찰에 붙이는 스티커를 이용하고 있다.

숭실대가 올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도입한 '술강권금지팔찌' 설명문. 숭실대 총학생회 제공
조선대 양성평등센터가 지난 20일 각 학과에 배부한 '존중 팔찌'. 조선대 양성평등센터 제공

이게 진짜 효과가 있을까 싶은데 신입생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다. 올해 숭실대 OT에 참석했던 A(20)씨는 “술을 들고 왔다 팔찌를 보고 물을 따라 주는 선배들도 많았다”며 “술을 많이 먹인다 그래서 OT 가기 전엔 ‘필름만 안 끊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김민수 서울시립대 총학생회장도 “형식에 그쳤다는 비판을 걱정했는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량에 맞춰 무리하지 않고 술자리를 함께 즐길 수 있어 좋았다’는 반응이 많아 올해도 스티커를 나눠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학교가 가르치듯 과음 방지 운동을 벌이던 옛 방식과 달리 학생들이 먼저 나서서 이런 아이디어를 냈다는 점이 특이하다. 연세대 총동아리연합회의 권순호(21) 인권복지팀장은 “어릴 적부터 강압적인 문화를 문제시하던 세대가 대학 내에 점점 늘어나면서 이미 술 문화가 많이 바뀐 부분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우원제 숭실대 총학생회장은 “지난 1월 총학생회 전체 간부 수련회 때 술 강권뿐 아니라 ‘술자리 혐오 발언도 주의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다”며 “예전엔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의 답변도 나왔을 것 같은데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는 부분”이라고 전했다.

반면 아직도 변화에 저항하는 집단도 있다. 남학생이 많은 공대가 대표적이다. 서울의 한 4년제 대학 공과대생인 김모(21)씨는 “좀 달라졌겠거니 했지만 여전히 의리주 등 술을 강권 문화가 남아 있었다”며 “다른 학교는 물론, 같은 학교의 다른 단과대조차 문제의식을 가지고 점점 개선해나가고 있다는 데 공대만 유독 구습이 남아 있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다 함께 술을 마셔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퍼진 상황에서 본인 주량에 맞는 팔찌를 찰 수 있을지, 팔찌를 차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건 아닐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조병희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어느 집단이건 집단 내 문화나 규범이 바뀌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변화를 주도하는 쪽이 팔찌처럼 긍정적인 이미지의 작업을 잘 만들어나간다면 더 빨리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어 조 교수는 “대학에서 이런 변화가 일고 있는 만큼 성인 사회도 이런 인식의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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