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떨친 청년 라파엘, 빈민가서 떠나지 않는 이유

조희경 2019. 4. 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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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희경의 행복 더하기(3)
최고급 아파트를 팔던 18년 차 마케터에서 NGO 신입생으로, 남 도우러 왔다가 내 마음 수련 중이다. 직장이 아닌 인생에서 멋지게 은퇴하고 싶어 선택한 길. 돈과 지식보다 진심 어린 마음이 더 위대한 일을 해낸단 걸 배우고 있다. 더 오래 사랑하며 살고 싶은 중년 아줌마의 고군분투 NGO 적응기. <편집자>
세계 3대 빈민가로 불리는 케냐 키베라 길거리의 모습 [사진 한국컴패션]

버스에서 내리자 하수구와 오물에서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뜨거운 태양과 울창한 밀림의 아프리카를 상상했는데, 서늘한 날씨에 비까지 와서 하늘은 온통 회색이다. 흙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폐수와 오물, 곳곳에서 보이는 동물 배설물의 냄새.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케냐의 첫인상이다.

지난해 5월, 컴패션 후원자들과 함께 찾은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 위치한 키베라. 키베라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빈민가다. 나이로비에는 도심에 마타레, 카왕과레 등 10여개의 빈민가가 있는데 2020년이면 이 도시의 빈민들이 전체 빈민 인구의 50%를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해발 1700km의 고원인 키베라는 화산지대라서 지하수가 부족한데, 그나마도 오염되어 식수 한 통에 50 케냐 실링을 주고 사 먹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질병과 범죄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현지에서 만난 케냐 컴패션 직원은 “에이즈 환자와 마약 중독자도 많으니 주민과 직접 접촉하거나 개인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실감했다.

후원자들과 함께 현지로 비전트립을 가면 어린이들의 가정을 방문하곤 하는데, 이곳에선 집을 찾아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키베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철길을 건너 좁은 골목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니, 길가 여기저기 쓰레기 더미가 널려 있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은 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흙과 돌을 그냥 던져 놓고 하수구에 빠지지 않게만 해 놓은 수준이었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위치한 빈민가 키베라의 골목길. 컴패션 후원자와 직원들이 후원 어린이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곳은 치안이 불안해 외부인은 반드시 무장경찰과 동행해야 한다. [사진 한국컴패션]

현지에서 종종 보게 되는 풍경 앞에 참담함이 밀려왔다. 엄청난 필요 앞에 우리의 노력이 너무 작게 여겨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길에서 만난 어린이들의 웃음 없는 표정과 흐릿한 눈동자였다. 무엇으로 이들에게 미소를 돌려줄 수 있을까.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들과 함께 자라는 어린 생명에게 도움을 준다 한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우리 뒤를 따라오는 건장한 체격의 아프리카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출발하기 전, 안전 때문에 경호원이 동행할 거라는 현지 직원의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경호원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동하는 내내 마주치는 아이들과 인사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이름까지도 다 아는 것 같았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혼자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 청년은 누굴까’ 혼자 궁금해하는 사이 후원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4명의 자녀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침대 하나, 테이블과 의자로 사용되는 뒤집어진 나무상자 두 개, 찌그러지고 더러운 부엌살림들이 가득 찬 서랍장이 가구의 전부였다. 그때 정체불명의 그 건장한 청년이 다시 등장했다. 그는 우리가 방문한 가정의 형편과 필요를 자상히 설명해줬다.

지난해 5월 케냐 나이로비 키베라에서 만난 케냐 컴패션 졸업생 라파엘(사진 맨 오른쪽)과 함께 후원 어린이 가정을 방문했을 때 모습. [사진 한국컴패션]

그는 빈민가 단도라에서 태어나서 자란, 컴패션 졸업생 라파엘(Raphael Jalang’o, 30세)이었다. 라파엘은 주 중에는 컴패션 직원으로, 주말에는 자원봉사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제야 그가 아이들과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며 그들과 격의 없이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라파엘은 8가구가 1개의 화장실과 수도를 사용하는 집에서 살았다. 그런 집조차도 집세를 내지 못해 비 오는 날 길거리로 쫓겨나,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새벽을 맞이했다고 했다. 5명의 형제자매와 쓰레기장을 뒤져 찾아낸 음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옆에서 자던 누나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후로 몇 년간, 라파엘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는 라파엘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라파엘의 상처를 회복시켜 준 것은 8살 때부터 매월 후원금과 편지를 보내준 미국 후원자와 컴패션 어린이센터 선생님이었다.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나이로비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본인이 받은 축복을 빈민가 아이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비전트립 기간 내내 마주했던 처참한 가난의 모습에 눌려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현지방문 마지막 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한국 후원자들과 케냐 컴패션 졸업생들의 모습. 키베라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기회를 주고자 묵묵히 아이들 곁을 지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후원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첫 줄 맨 왼쪽이 라파엘. [사진 한국컴패션]

현지 방문 마지막 날, 우리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대학을 마친 컴패션 졸업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상위 1%가 전체 국민소득의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빈부의 격차가 큰 케냐는 공립과 사립학교의 교육환경 역시 차이가 매우 크다.

컴패션에 등록된 학생 대부분은 등록금 부담이 적은 2년제 대학이나 4년제 공립대학에 다닌다. 그래도 대학을 졸업하면 가난을 벗어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졸업생 대부분은 가난의 탈출구를 선택하는 대신,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묵묵히 가난의 삶을 감당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오름과 동시에 아팠다. 대학을 졸업하면 얼마든지 더 좋은 직장을 구해 이 빈민가를 벗어날 수 있는데도 ‘더 많은 어린이에게 희망과 기회를 주기 위해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 고 말하는 그들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청년들의 모습은 함께 한 한국 후원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40대 후원자는 “사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 성공을 하니 그만하고 싶은 때도 있고 때론 허전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는데 이곳에서 내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며 “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내가 배우고 간다”고 고백했다.

라파엘이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져온 미국 후원자의 편지. 라파엘은 후원자를 ‘내 삶을 변화시킨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사진 한국컴패션]

얼마 전 라파엘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전 세계 컴패션 어린이들을 대신해 한국 후원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손수 준비해 온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저는 미국인 후원자님의 후원으로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지옥 같은 날들을 견디게 해 준 것은 후원자님이 보내주신 이 편지들입니다. 후원자님의 편지를 가지고 있으면 늘 가까이 있는 것 같았고, 편지를 읽으면 언제나 따뜻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과 저는 단순히 후원자와 후원 어린이의 관계를 넘어 제 삶을 변화시킨 가장 친한 친구 관계였습니다.

후원자님이 계셨기에 비참했던 제 삶에 적극적으로 맞설 수 있었습니다. 후원자님은 항상 사랑한다고, 제가 자랑스럽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한 마디가 비참한 상황에 있는 한 아이의 삶을 기적처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도시빈민가 키베라. 그곳의 비참하고 가난한 삶은 상상조차 힘들다. 그런 곳을 변화시키는 것은 라파엘처럼 빈민가를 지키고 있는 청년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빈민가 어린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이자, 확실한 희망의 상징이다. 어린이들의 마음에 ‘나도 할 수 있다’, ‘저 형, 누나들은 내 마음을 안다’, ‘나도 저 형, 누나들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울려 퍼지게 하는 ‘사랑’. 이 사랑이 진정한 가난의 탈출구임을 우리는 안다.

조희경 한국컴패션 후원개발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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