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남성이 입던 속옷을 구매하는 아시아 여성'..독일 인종차별 광고 항의서명운동 나선 유학생

심윤지 기자 2019. 4. 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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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독일 DIY 기업 호른바흐가 지난 15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영상 광고.
독일 DIY 기업 호른바흐가 지난 15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영상 광고.

땀흘려 일한 백인 남성들의 속옷을 연구원들이 수집한다. 남성의 체취가 묻은 속옷은 진공 포장된 상태로 회색빛 도시의 자동판매기에 진열된다. 한 젊은 아시아 여성이 자동판매기에서 구입한 속옷 냄새를 맡으며 황홀감을 느끼는 순간, 화면 가운데 부분에 ‘이게 봄내음이지’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최근 독일의 DIY 업체 호른바흐가 공개한 광고 내용이다.

독일 쾰른대에서 매체문화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강성운씨(34)는 지난달 25일 트위터에서 우연히 이 광고를 발견했다. 강씨는 “인종차별과 여성혐오가 모두 담긴 광고”라며 문제를 제기했지만 호른바흐의 대응은 안이했다. 결국 강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나는 호른바흐 당했다’는 뜻의 해시태그(#Ich_wurde_geHORNBACHt) 운동에 나섰다. 광고 삭제와 사과를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도 제기해 일주일만에 2만명 이상이 서명했다. 1일 강씨와의 e메일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호른바흐는 어떤 회사인가

“집수리, 정원 관리 용품과 기자재를 주로 판매한다. 독일 전국에 97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체코, 스위스, 스웨덴,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 유럽 9개국에 총 160여개의 지점을 두고 있다.”

-호른바흐의 광고가 왜 문제적이라고 생각했나

“이 광고에는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이 모두 담겨있다. 아시아 여성은 오로지 백인 남성의 자존감을 북돋아주는 철저히 도구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호른바흐와 제작사인 하이마트 측은 이 광고가 ‘일본에 있다는 속옷 자판기를 패러디 한 것일 뿐 아니라 여성이 주도적으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여성주의적 광고’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호른바흐 광고의 타깃은 직접 정원일을 하고 집수리를 하는 50대 이상의 백인 남성이다. 땀에 찌든 백인 남성의 속옷 냄새를 맡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는 백인 남성들에게 ‘아시아계 여성은 나의 가장 더러운 부분까지도 좋아해주는 존재’라는 그릇된 환상을 심어주게 된다.”

-광고가 무슨 내용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주류 사회의 독일인들도 이 광고가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다. 그러나 출생지와 상관없이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는, 혹은 생활한 경험이 있는 아시아인들은 곧바로 분노한다.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일상적 차별의 경험이 이 광고에 날 것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호른바흐 공식 트위터계정은 26일 강성운씨의 문제제기에 “우리 광고는 인종차별 광고가 아니다. 가속화하는 도시화, 도심에서의 삶의 질 저하에 대한 담론으로 봐달라”고 했다. 호른바흐는 또 백인 남성과 여성도 광고 모델로 등장한다는 점을 들며 ‘다양성을 추구한 광고’라고 해명했지만, 한국과 일본 누리꾼들은 아시아 여성 모델만 눈을 치켜 뜨는 등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호른바흐 측에는 처음 문제제기를 한건 언제였나

“3월25일 밤 호른바흐 측의 공식 트위터 계정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고객상담센터가 아닌 트위터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사람이 대화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광고가 심의를 통과해 나오게 된 과정에 문제를 제기했고, 시사회에 아시아계 여성이 몇 명이나 있었는지 물었다. 단 한 사람의 아시아계 여성이라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 광고는 통과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호른바흐 트위터 계정이 제 멘션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호른바흐는 “광고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봄내음을 맡을 수 없는 회색의 콘크리트 도시’일 뿐 반드시 아시아 국가로 볼수는 없다”고 해명했다.

“입장문이 나온 26일 광고를 다시 한 번 돌려보다가 광고 속 컨베이어벨트에 일본어가 적힌 사실을 발견했다. 그전까지 호른바흐는 광고 속 배경이 되는 도시가 아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증거화면을 첨부해 거짓말을 지적해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서명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서명운동에 나서고 호른바흐의 태도가 달라졌나

“서명운동을 시작하고 하루 사이에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했다. AFP통신을 비롯한 외신에서도 소개가 됐다. 그러자 호른바흐는 아예 트위터 상의 모든 대응을 멈췄다. 그리고 굉장히 촉박한 일정으로 ‘열린’ 대화를 제안했다. 이러한 비판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행동은 전혀 달랐다. 참여 신청은 24시간동안 받고, 참가를 문의한 사람들에게는 바로 3일 뒤인 4월1일 월요일에 본사가 있는 보른하임으로 오라고 했다.”

https://youtu.be/Z3iNXwHBKoI

호른바흐가 강씨에게 ‘열린 대화’를 제안한 것은 지난달 28일이다. 참석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늦어도 29일 오후 3시까지 연락을 달라”고 했다. 사실상 하루 정도의 기한만 주면서 시간과 장소를 통보한 것이다. 강씨는 “남들 다 출근해서 일하는 평일에 독일 사람들도 어딘지 모르는 소도시로 급박하게 오라는 것은 참여자 수를 줄이고 캠페인의 가치를 깎기 위한 수단”이라며 참석을 거부했다. 남성인 자신이 사측과 논의하는 것은 당사자인 아시아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호른바흐의 ‘열린 대화’ 제의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화 제안은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고 특히 독일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한 쇼에 불과했다. 열린 대화가 너무 외진 곳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직접 취재를 간 독일 기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 언론들은 대화 다음 날 호른바흐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아무런 사실 관계 확인도 없이 그냥 받아적고 있다. 많은 독일인들은 호른바흐가 사과를 했고,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광고는 여전히 진행중이고, 광고제작사는 아예 문제가 된 화면을 SNS 메인 이미지로 걸고 도발하고 있다.

강씨가 ‘열린 대화’ 제안을 거부하자 호른바흐 사가 트위터를 통해 공개한 입장문. 호른바흐사는 강씨가 대화 제안을 거부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이번 만남은 언론 앞에서 악수하는 사진을 찍는 행사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는 주제에 대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강씨를 재초청했다. 호른바흐 트위터.

-이 광고에 대한 독일 사회의 반응은 어땠나.

“제 주변인들은 모두 더럽다, 불쾌하다, 혹은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에선 압도적인 다수가 그저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위원 전원이 백인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광고위원회의 경우 ‘광고에 문제가 없다’는 견해를 내기도 했다. 독일 언론들 역시 이 문제를 인터넷 상의 논란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독일 사회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물론 편견없이, 호의로 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아시아인은 관광객 아니면 유학생으로만 여길 뿐, 독일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희박하다. 특히 아시아 여성에 대해서는 이른바 ‘카탈로그 신부’(나이 든 백인 남성이 카탈로그만 보고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동남아시아 여성)나 영화 속 이국적인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이러한 대중매체속 이미지가 더욱 위험한 것이다.”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다른 인종에 비해 크게 공론화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다.

“호른바흐는 이 광고가 다양성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럼 왜 무슬림과 유대인이 등장하는 버전은 없나. 호른바흐는 그런 광고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독일에서 반유대주의와 반이슬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미흡하나마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아시아인들은 온순하고 자기 목소리가 없는 존재로 자주 소비돼왔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시아인이 크게 목소리를 내야한다.”

독일 인종차별 광고 항의서명운동을 주도한 강성운씨 (c) Patric Fouad / pfp

-누리꾼들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언어로 된 보도자료를 발표하고 있다.

“지금까지 열 분 정도가 실제로 번역을 보내주셨다. 청원 제안서는 영어, 독일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 5개국어로 볼 수 있다. 사실 도와주시는 분이 너무 많아서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다. 국적과 연령을 초월하여 여성들이 연대를 해주신다. 이 광고가 유럽에 사는 아시아계 여성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계시고, 그 배경에는 이 분들이 공유하는 차별의 경험이 있다. 그것이 동력이다.”

-일본 언론들도 이 사안을 보도하고 있다.

“허핑턴포스트 재팬을 시작으로 도쿄신문, 후지TV 등 많은 일본 언론들이 제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정작 독일 현지에서는 지금 독일 바깥에서 독일의 인종차별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인권 전문 기자들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같은 외국으로만 시선을 돌리지 독일 내에서 차별을 겪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는 무지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독일은 여전히 전통적인 미디어에 대한 신뢰도와 의존도가 높다. 저희도 목소리가 있지만, 적당한 방법과 채널이 없다.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방법도 모르고, 알고 지내는 언론인도 없다. 호른바흐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수백 수천명이 문제제기를 해도, 한 사람이 만든 보도자료가 여론을 지배한다. 이런 식으로 독일 사회의 소수자의 목소리가 지워지는구나 통감하고 있다. 이번 캠페인이 마무리 되면, 독일 내 소수자의 목소리가 주류 언론 종사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제도개선에 나서고 싶다.”

-호른바흐에 대한 요구사항은 어떤 것이 있나.

“이 사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은 제작 상의 실수를 공적으로 인정하고, 해당 광고를 모든 채널에서 내리는 것 뿐이다. 변명은 필요없다. 더불어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독일 광고위원회의 구성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아시아계는 고사하고 터키계가 한 사람도 없는 광고심의위원회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광고가 제작되고 무사히 심의를 통과한 것이다. 목소리를 키우고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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