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아무튼, 주말] 보고서 치장은 그만, 글로 써라.. '제로 PPT' 선언하는 기업들

김미리 기자 2019. 4. 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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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의 꽃' 이었던 PPT가 진다

"가족 여행 짜는데 자동으로 PPT(파워포인트·프레젠테이션용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더라고요. 강박적으로 텍스트 줄 맞추고 색깔 넣고. PPT 기계가 된 것 같아요." 13년 차 직장인 A(40)씨가 말했다. 회사에서 그의 별명은 'PPT 자판기'. 군 행정병 시절 배운 실력으로 입사 때부터 보고서를 도맡았다. 보고받는 임원 취향 따라 기사형, TED형, 애플형 등 프리스타일 변주까지 가능하다.

A씨 같은 'PPT의 달인'들에게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일 수도 있겠다. 최근 들어 PPT 보고서를 줄이는 회사들이 점차 늘고 있다. 아예 '제로(zero) PPT' '노 파워포인트(No PowerPoint)'를 내세우는 기업까지 나왔다.

'명퇴'하는 PPT

국내 기업에서 파워포인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90년대 말 무렵이다. 이후 '회의의 꽃'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누렸지만 몇 년 사이 PPT를 '명예퇴직'시킨 회사들이 등장했다. "업무 효율을 높이는 도구로 도입했는데 도리어 업무에 부담 주는 주범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PPT 퇴출을 선언한 1호 기업은 현대카드다. 2016년 정태영 부회장은 '제로 PPT'를 선언했다. 업무만족도 조사에서 직원들이 호소한 고충 셋 중 하나가 'PPT 작성'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사내 보고용 문서는 PPT 대신 워드와 엑셀로 작성한다. 대외용 문서 작성용으로 부서마다 컴퓨터 한 대만 파워포인트를 깔도록 허용하고 나머지 컴퓨터에선 프로그램을 삭제했다.

실험 4년 차 시행착오는 없었을까. 정 부회장에게 직접 물었더니 설명이 돌아왔다. "처음엔 엑셀로 PPT를 흉내 내는 보고서가 간혹 나왔습니다. PPT를 사용하는 것보다 시간이 드니 더 나쁜 경우였어요. 그래서 1년에 두 번 메모리에 남은 모든 작성물을 감사해서 PPT와 유사한 보고서들을 잡아내고 A·B·C 세 등급으로 나눠 벌칙을 줬습니다. 계몽 기간이 끝난 작년 하반기부터 벌칙 수위를 올렸는데 해당 부서의 복지비를 한 달 또는 두 달간 없애는 방식입니다. 개인을 벌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고 부서 분위기가 바뀌니까요."

정 부회장은 "사내에서 우리끼리 멋있는 보고서를 돌려 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며 "한 시간 내용을 고민하고 다섯 시간 PPT 구도와 색깔에 우리 시간을 소모한다면 난센스다. PPT 스킬이 보고 내용을 저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두산그룹도 PPT를 금지했다. 보고 문화 개선의 일환이었다. 직원들이 익숙해하지 않자 두 달 뒤 박지원 부회장이 사내 포털에 다시 당부 글을 올렸다.

"피보고자의 편의를 위해 워드나 엑셀로 기존 PPT 양식을 똑같이 따라 만든다든지 추가 설명을 위한 첨부 자료를 수십 장씩 다는 행위, 보고받는 단계에 따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수차례 재작성하는 일을 모두 지양해야 합니다." 박 부회장은 "PPT 차단은 보고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PPT 보고서부터 만드는 관행을 바꾸기 위한 선언적인 조치"라면서 업무 특성상 필요한 직원은 차단 예외자로 지정하게 했다.

'회의 다이어트'… PPT도 줄어

전면 금지가 아니더라도 PPT 의존도는 줄어드는 추세다. 아모레퍼시픽은 올해 '캐주얼 보고 습관화' '보고 문서 간소화'를 내걸고 꼭 필요한 경우만 PPT를 쓰고 사내에서 획일적인 PPT 양식은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2장짜리 '워드 보고' 양식을 배포해 권장하고 있다.

1993년 입사한 신세계 홍보팀 장혜진 담당은 PPT의 진격과 후퇴를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IMF 외환 위기 직후 마케팅 부서부터 PPT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픽과 사진이 들어가니 자료의 가시성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면서 다른 부서까지 확산됐지요. 'PPT의 신=일 잘하는 직원'으로 통했지만 3년 전쯤부터 꺾이는 추세예요."

주 52시간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효율적인 근무 시간 활용이 이슈가 되면서 '회의 다이어트' '보고 다이어트' 현상이 나타났다. 장 담당은 "주 52시간(신세계는 주 35시간)이 시행되면서 웬만하면 보고서 대신 구두로 간략하게 보고한다"며 "PPT 장 수가 많으면 역적으로 꼽히고, 회의하면 으레 한쪽 벽면에 PPT 화면부터 띄웠던 풍경도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회의(會議)하다 직장 생활에 회의(懷疑) 느끼는 일은 줄이자는 자성이다.

글로만 쓴 보고서, 숨을 데가 없다

PPT 금지가 꼭 시간을 줄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과잉 포장을 걷어내고 본질에 집중하자는 취지가 깔려 있다. 몇 달 전 '아마존은 글을 쓰는 회사다'라는 글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삼성전자에서 룩셈부르크에 있는 아마존 유럽 본사로 이직한 김태강(30·시니어 프로덕트 매니저)씨가 쓴 경험담이었다.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는 '노 파워포인트' 흐름을 이끈 인물이다. "파워포인트는 애매모호한 소통 메커니즘이며 요약 목록 사이에 숨기는 쉽다"면서 '6 페이저(6-pager)'라는 방식을 고안했다. 회의 참석자는 각자 워드로 A4 6장짜리 줄글(글씨 크기는 10~11포인트)을 써서 와야 한다. 신문 기사 스타일로 쓰기도 한다. 회의가 시작되면 참석자들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15~20분 정도(짧은 회의 경우 5~10분) 읽은 뒤 토론한다. 아마존이 최근 승승장구하면서 '6 페이저' 방식은 더 주목받고 있는 상황. 올 초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김태강씨는 "아마존은 반복적인 일이 있다면 자동화를 고민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는데 모든 시작에 '글'이 있다"면서 "상사에게 처음 들은 말이 '두 번 이상 동일한 질문을 받으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답을 글로 남겨 써놓고 URL만 보내주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글을 적다 보니 제품의 단점이나 놓쳤던 부분을 보충할 수 있게 된다"며 "언변이 좋은 사람들에게 PPT는 더할 나위 없는 매개체다. 논리적이지 않아도 타인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글에는 숨을 곳이 없다"고 했다.

회의용 글은 유려한 글이 아니라 쉽고 논리정연한 글이다. 김씨는 "제 매니저는 딸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면서 최대한 간단하고 읽기 쉽게 쓴다고 한다더라"고 했다.

보고서가 화려한 시각적 장치를 걷어내고 '쌩얼'을 드러낸다. 알맹이로 진검승부 해야 하기에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태영 부회장도 "PPT는 콘텐츠가 없어도 분식(粉飾)할 수 있지만 글을 쓰면 평소 의견이나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여실히 드러난다"고 했다.

PPT는 죄가 없다? 리더가 문제?

'노 PPT'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PPT 제작 대행 업체 원포인트 프레젠테이션 고인석 대표는 "PPT는 죄가 없다. 툴이 잘못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문제"라고 했다. 그는 "기업에서 부실한 내용을 덮기 위해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예쁜 문서'를 강조하는 게 문제"라며 "필요한 만큼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면 PPT는 여전히 유용한 툴"이라고 했다.

파워포인트를 만든 MS 출신의 한 기업 임원은 "MS에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PPT를 자유롭게 쓰는데 오히려 한국 기업들은 줄 맞춤, 글꼴, 색상 등 지엽적인 부분에 집착한다"며 "한국 기업 특유의 형식주의가 불러온 본말전도가 제로 PPT를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보고자의 실력도 드러나지만 진짜 문제는 의사결정권자의 문해력(文解力)이란 시각도 있다. 한 대기업 직장인은 "요지를 빨간 글씨나 굵은 글자로 크게 해서 표시해도 이해 못 하는 임원도 있고, 글자가 많으면 화부터 내는 상사도 많다"며 "글 읽기가 익숙하지 않은 상사가 태반인데 PPT를 없앨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태강씨는 "국내 기업에도 통찰력이 뛰어난 임원은 많은데 아마존에서 놀란 점은 직급이 높을수록 문해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점"이라며 "1시간 회의하면 20분 글을 읽고 질문을 받는데 임원들 질문이 너무 날카로워 베일 것 같다"고 했다. 결국 리더가 스마트해야 보고도 스마트해진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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